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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Dec 14. 2023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2

두 번째 우리 집


내가 도시로 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사연은 나름 기구하다.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이 있던 군내에는 농업고등학교 하나, 인문계 고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대체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도내 대도시나 타 군의 나름 이름 있는 고등학교에 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고등학교가 없어서 도시에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겠으나, 도내의 대도시나 타 군내 학교가 아닌 멀리 수도권의 고등학교를 간 건 좀 과한 점프(?) 같기도 했기에 이 틈을 기구함으로 채워야 함을 배제할 수 없겠다.


그 수도권의 고등학교는 외갓집이 연이 되어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원래 나의 첫 번째 우리 집 근처의 시골 마을에서 사셨는데, 언제인지 또는 한 번에 그랬는지 순차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기혼 미혼을 구분하지 않고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등 모든 가족을 대동하고 도시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근거리에 살던 엄마가 아버지와 혼인한 것을 보면 엄마 혼인 이후 이주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왜 엄마 가족만 남겨졌는지 짐작은 되나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아마 도시로 갈 상황이 안 되었을 것이라는 정도로 해두자.

어쨌든 그 이촌향도의 시대 흐름에 편승해서 이주하셨을 때 외할아버지는 재산이 좀 있으셨는지 나름 정착을 잘하신 듯하다. 워낙에 치밀하시고 성격이 불같으신 가장으로서 그 시대의 대표적인 강한 아버지 상이신 건 분명히 기억난다.


세월이 흘러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외할아버지는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 - 엄마가 혼인할 때 못 해준 - 장롱을 놔주시기도 했고, 그 이후로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가서 며칠씩 있다 오기도 했다. 점점 외갓집이 친해졌고 편안해졌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특히나 나를 이뻐해 주셨다. 엄마를 시집보내고 얼마나 살지 몰라 혼수를 안 해줬다는 설도 있고 대충 아들 딸 낳고 그럭저럭 사는 걸 보고 아버지가 기특하고 외손주가 이뻐져서 그랬을 거라는 설도 있고.. 대체로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내가 중학생이 되었고 나는 방학마다 여전히 그 제2 고향 같은 외갓집에 갔고 외할머니는 여전히 나를 반갑게 맞아 주고 발을 씻겨 주셨고 외할아버지는 흐뭇한 얼굴로 우리 남매에게 짜장면을 사주시고 닭도 잡아 주셨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은근히 공부가 재밌었고 잘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난 어려서 글을 모를 때부터 동네에서 얻은 화장지용 중학생 교과서를 보며 책을 보는 걸 좋아하고 글씨를 그리며(?) 되게 멋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가서 한글을 깨치면서 글 읽는 것이 역시 되게 멋있게 느껴졌고 책을 좋아했다. 시골마을에는 활자본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동네에서 이사 가는 먼 친척집에서 가져온 성인용 책들(철학 소설 에세이 등까지)을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진지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동화가 아닌 어른스러운 책 읽는 두려움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교육열이 강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유언을 한 것도 '공부 잘하라'는 거였고, 친척들이 주변에서 나를 볼 때마다 한 얘기도 유사했다. 그건 아버지의 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이 한국전쟁과 겹치고 집이 가난해서인지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다른 아버지 형제들은 적어도 어떻게 해서든 한글이라도 깨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왠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군대조차도 갈 기회를 못 얻어 뭘 배울 기회는 더욱 없었고, 착한 성정을 타고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먹고사는 일에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듯하다. 10대 때부터 옆집 머슴까지 살며 가족을 챙기는 데 열심히였고 자신이 글을 배워 뭘 해보겠다는 생각을 못 하신 것 같다. 아마 현실의 벽에 자포자기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아버지의 암산 능력은 탁월하여 배운 사람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친척들이나 주변 동네분들의 일관된 증언. 그러니 할머니는 아버지를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고 손자인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도 본인이 글을 몰라 받는 설움으로 술을 잔뜩 먹고 취하시어 한풀이를 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많이도 당했고 많이도 억울했다. 요즘이라고 나을 것은 없지만, 많은 게 부족하고 각박했던 그 옛날 아버지가 당한 일들은 예측할 만하다. 그러니 나를 가르치겠다는 의지는 곳곳에 나타났다. 아버지가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전혀 문제없이 공부하도록 모든 걸 해주셨을 것이다. 세상 일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니 문제지만.


중1 방학 때 나는 외갓집에서 문득 세계명작소설집을 발견하고 또래의 사촌들과 노는 대신 정말 눈치 없게 무심코 잡은 펄벅의 ‘대지’을 읽기 시작했다. 근데 신기하게도 내용이 눈에 들어오면서 오래 걸렸지만 완독하고 감동까지 하게 이른다. 그 뒤 방학 때는 외할머니와 공모해서 몇 권씩을 받아 시골에 가지고 갔는데, 그건 사실 미혼이던 막내 이모 책이었고 이모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 아마 결혼 인사차 - 시골의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 와서 십 수권의 도난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웃으며 범죄(?) 사실을 용서해 줬지만.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면 도대체 그 시골 촌놈이 어떻게 이런 모양이 되었는지 지금의 나조차 이해하기가 어렵다. 참으로 호기심이 많았는데 체력이 좋아 그걸 채울 에너지가 있었다. 중2 방학 무렵까지 여름 방학 겨울 방학을 외갓집과 외숙모댁을 오가며 도시도 경험하고 그들의 문화도 엿보는 계기가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진학을 앞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있는 데서 대놓고 나의 후원자를 차처 해 주셨고 나 진학을 위해 쓰라고 작은 송아지도 아버지에게 사 주셨다고 한다. 나에게도 고등학교는 여기 올라와서 다니라며 밝은 미래를 설계해 주셨다. ‘너는 반드시 한의사가 돼라’고 하면서까지.

그런 외할아버지는 불행히도 내가 중3이 되기 불과 몇 주 전에 돌아가시고 만다. 사연을 알 수 없으나 그 아늑하고 고향집 같던 도시의 그 ‘푸세식’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한다.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말씀하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꿈을 절대 절대 버리지 않고 기정사실인양 공부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 ‘첫 번째 우리 집’에서의 불행한 일을 겪고 나서도 그 꿈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집안이 기울었으니 실업계를 추천했나 나는 듣지 않았다. 외갓집 사정이 여의치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난 무시했다. 고행의 시작인지는 알지 못했다.


결국 내 평생 가장 화려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도시의 -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살던 - 포근했던 외갓집이 아닌 외숙모 댁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는 수술 부위가 완치되지도 않았지만 극성스러운 아들 녀석 때문에 사정과 부탁을 해서 나를 거둬 줄 수 있도록 조치를 한 듯했다. 아버지는 나를 거둬주는 대가로 외숙모 댁에 쌀을 보내기로 했을 것이다. 나중에 추수 때마다 커다란 트럭이 외숙모 댁 앞에 온 거을 보면 알 수 있다. 돈이야 병원비로 쓸 것도 모자랐을 테니.

나는 정말 정말 촌놈이었는데 그 도시의 기차역 옆의 농협에 입학 등록을 하려고 무려 15만 원 상당의 거액(?)을 양말에 넣고 간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의 두 번째 우리 집’은 큰 외숙모네 집이 되었다.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한다며 철없이 좋아하며 펑펑 논 긴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입학을 할 무렵은 이미 엄청난 충격과 패배감의 시작이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려운 영어나 수학시험을 입학 전에 봤고 거의 최상위권으로 입학을 했던 나는 중하위권으로 바로 곤두박질쳤다. 이미 선행학습을 어마어마하게 한 머리 좋은 도시 친구들은 한참 멀리 앞으로 간 뒤였다.


더불어 나의 두 번째 우리 집은 시작부터 적응하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나름 당시로는 세련된 단독 주택이었는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앓아누우신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가운데 방에, 외숙모와 외사촌 누나는 안방에, 그리고 나와 동갑인 외사촌, 그리고 외사촌 동생은 나랑 끝방에서 살았던 것으로 얼핏, 아니 추측으로 기억한다.

내가 다니던 인문계 고등학교는 그 동네에서 아니, 전국에서 나름 유명했다. 공부를 정말 강도 높게 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니 우리 고등학교는 그 지역 주민의 자랑이었고 자존심이었다. 옥상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발견하면 주변 아파트 주민이 교무실에 전화할 정도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외숙모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외숙모가 싸주시는 도시락 2개를 책가방에 넣고 7시까지 학교에 갔다. 버스는 하루에 한두 번만 보던 촌에 살던 나는 버스에서 흔들리며 등교를 했다. 학교에는 이미 한참을 앞서 나간 친구들이 있었다. 다들 여유를 부리며 자율학습시간에 잠을 퍼 잤지만 성적은 항상 상위권인 괴물 같은 천재들이었다. 엄청난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을 받으며 애를 써 봤지만 느껴지는 열등감은 어쩔 수가 없었고 도시의 차가움도 함께 다가왔다.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오면 밤 11시 무렵이 되었고 거기서 또 저녁을 먹은 뒤 잠을 잤다. 눈치가 보여 저녁을 안 먹고 자다가, 정말 눈치가 없는 외삼촌 덕에 외숙모는 나의 저녁까지 챙겨줘야 했다.

몇 주를 그렇게 사는 데 이건 도무지 불편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새벽에 불편함을 피해 얼른 버스를 잡아 타고 학교에서 내리면 벽과 같은 천재적 친구들을 보며 계속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애써 애써 뭔가를 해보려 해도 그 열등감 속에 조급함과 서두름을 감출 수가 없었고 나는 악순환에 빠졌다. 그러고 버스를 타고 나의 두 번째 우리 집에 가면 다시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함. 결국 나의 가장 행복한(?) 곳 혹은 가장 해방감을 느낀 장소가 버스 안이라면 과장일까.

그곳마저도 한 번은 도시의 불량배를 만나 저항 한 번 못하고 된통 얻어맞고 코피를 질질 흘리며 나의 두 번째 우리 집에 갔던 기억이 있었으니, 차라리 내 쉴 곳은 없다고 봐야 했다.

좀 더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나랑 동갑인 사촌 형은 그 도시의 유명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 주변에서 보기엔 나와 비교 대상이 되다 보니, 나는 외숙모에게 더욱더욱 미안해지고 죄지은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늦게 등교하고 일찍 귀가했으며 2개까지의 도시락도 쌀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 우리 집에서 외숙모가 하루에 밥을 한솥 하면 그 많은 식구 중에 내가 반 이상을 소모했다. 나의 식성은 외숙모의 맛난 음식 솜씨에 나날이 늘었고 반면 다른 식구들은 도시인들처럼 소식을 했다.


입학을 하고 5월 연휴 무렵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 처음 갔는데, 그 녹음이 눈물 나게 편안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때도 아버지는 소를 몰며 논을 갈고 계셨고, 아직 아물지도 않은 수술 자리에 복대를 두르고 일하는 모습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나의 이기심은 다른 이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나는 논두렁에 대가리를 처박고 싶었다.


나는 장학금을 받고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는 게 맞았다. 큰아버지의 충고는 옳았다. 대학을 가서 멋진 인생을 산다는 나의 꿈은 다음 세대나 실현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고 나는 그 희생으로 나의 밝은 미래를 꿈꾼다. 이건 공평하지 않다. 나는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 나는 포기해야 한다. 나는 틀렸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허무주의 패배주의에 빠져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외숙모의 부담이 좀 덜어졌다 해도 나의 심적 부담은 줄기는커녕 더더욱 커져만 갔다. 내성적인 데다 숙맥이다 싶을 정도로 주변머리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고, 명랑하고 밝은 부분을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밉상이라 스스로 생각해 더욱 그랬다.

그게 1학년 때인지 2학년 때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급기야 심각한 복통에 시달리며 입원을 하기에 이른다. 무식한 인내심은 이때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온통의 긴장 상태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풀지 못한 채 몸에 무리가 간 것으로 짐작한다.


죽을힘을 다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기를 막막하게 보내고 보내 1년을 채우게 되었고 2학년이 되었다. 나의 밝은 미래는 이미 없어졌고 대학은 포기 상태였다.

봉고차를 타고 등하교를 하면서도 책을 보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못 하니 안 된다며 그랬고, 이런저런 참고서와 문제집을 맘껏 사들고 풀어 젖히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못 하니 안 된다며 그랬고, 배가 고파 엎드리고만 싶을 때 매점에서 웃고 즐기며 맘껏 간식을 먹는 친구들을 보며 난 못하니 안 된다며 그랬다.

그리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는 항상 연휴가 끼어 있었는데 벼락치기를 할라치면 어디 도서관이라도 가야 하는데 차마 연휴까지 도시락을 싸달라고 말할 용기가 안 나 멍하니 ‘유머 일번지’나 여타 코미디 프로를 보고 앉아 있으면서 나는 못 하니 안 된다고 그랬다.

어떻게 용기 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려다가도, 버스를 타고 가서 도서관에 자리 잡으면 배가 고팠고 딸랑 남은 우동값으로 그걸 먹고 나면 졸려서 엎어져 잤고 잠에서 깨어 공부 좀 하려고 보면 금세  또 배가 고팠다. 집중력은 더 떨어지고 배가 너무 고파 남은 버스비를 소진하고 나의 두 번째 우리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차라리 쉬는 게 나았을지도.

나의 내신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고 대학은 더더욱 멀어져 갔고 마음도 더더욱 멀어져 갔고 패배감과 허무주의는 더더욱 커졌다.

중학교 때 꿈꾸던 의사의 길은커녕 대학도 못 갈 판에 화학이나 생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나는 점점 불량학생이 되어갔다. 그저 모든 것을 잊고 몰입에 좋은 수학은 끈을 놓지 않았는데 이마저도 쓸데없이, 어쩌면 조급증에, 아니 어쩌면 열등감의 해소 차원에서, 어려운 문제만 매달려 머리 좋은 친구랑 비슷해지려고 하다 보니, 정작 시험 문제에 나오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마저도 실수하기 십상이었다. 당연히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나는 드디어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나고부터 나는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외삼촌이 말려도 고집을 부렸다. 돈에 대한 대단한 콤플렉스와 한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도 가출을 하고 고생은 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성공적인 살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며 가출도 생각했는데, 복대 찬 아버지를 생각하니 억울(?)하더라도 여기에, 나의 두 번째 우리 집에서 나가는 건 너무 과한 생각이라는 이성은 남아 있었는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대신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신문배달은 중학교 때 방학 때마다 동갑인 외사촌이 하는 걸 따라 한 적이 있어서 먼저 생각났고, 온통 고민 속에서 허무감 속에서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는 대신 몸을 미치도록 쓰고 싶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한 시간 신문을 돌리고 5시에 와서 밥 먹고 도시락 두 개 들고 버스를 타고 7시에 등교하고 수업시간에 자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자고 11시 무렵 귀가해서 밥 먹고 4시간여를 자고 4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는 생활을 4개월 정도 했다. 12월쯤 되니 춥기도 했고 지치기도 했고 남은 게 1년이라고 생각하니 끝이 보여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신문배달을 관두겠다니 그 당시 나에게 월급을 주던 신문사 아저씨는 월급을 안 주면서 못 나가게 했던 기억이 난다. 무지하게 열이 받아서 백지에 휘갈겨 한스러운 글을 써서 서랍 맨 밑에 놓아둔 적이 있다. 물론 끝내 받아내긴 했다.


그 사이 내신은 더더욱 엉망이 되었고 나름 도시생활과 학교생활은 적응했으나 남은 현실은 더더욱 막막했다. 끝이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낄 때 사람은 힘을 내는 모양이다. 난 어느새 정신이 들었다.

사실 이러한 패배감 속에서도 나름 위안 혹은 도움을 받는 일이 있었는데 그건 고3 담임이 된 선생님 덕이었다. 이분은  입학을 하면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인데, 첫 번째 우리 집 근방의 고향 분이셨다. 나의 개인적 사생활을 잘 알고 계셨다.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운 성적을 보인 나를 안쓰럽게 보셨는지 한심 혹은 괘씸하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종종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셨다. 성적은 엉망이었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집안이 어렵다는 것 등을 들어 장학금의 기회가 오도록 하셨다.

한번은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유를 적은 서류를 본 적이 있는데 엄마 얘기였다. 장애가 있다는 식으로 엄마를 묘사한 걸 보고 화장실에서 소리도 안 내고 엉엉 울었었다. 진짜인 것도 같았고 아닌 것도 같은 엄마는, 외부에서 보기엔 진짜였던 것이다. 나는 장애를 갖은 엄마의 아들인 것이다. 그래도 그 장학금 받았고 그 덕에 아버지의 등록금 부담은 좀 덜 수 있었다.

우연히도 그 선생님이 고3 담임이 되니 정신이 좀 났고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나는 또 너무너무 미안했고 실패한 내 모습을 보이는 게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렇게 된 마당에, 이렇게 애써 주는 분이 계시는데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힘 한번 써보자,라고 생각했다.


나의 두 번째 우리 집 생활을 1년 남겨 두고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나에게 끝이 보인다는 건 외숙모에게도 끝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외숙모는 골초의 외삼촌과 3남매를 키우면서 부업으로 재봉일까지 하셨다. 거기에 불청객이자 상당히 불편한 존재였을 나까지 케어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나를 케어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거기에 장손 며느리였으니 제사까지 꼬박꼬박 치러야 했다. 그런 일에 외숙모에게도 끝이 보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연휴가 끼어 내신은 엉망이었을지언정, 나름 모의고사는 절망적 수준은 아니었다.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내신을 ‘육두품’이라며 자괴적인 말을 쓰긴 했지만 기적에 도전하는 심정으로 모의고사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고3이라고 해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 도시락을 싸달라는 말은 끝내 못했다. 다만 학력고사를 치르기 몇 달 전부터는 큰맘 먹고 고3이라는 특수 신분(?)을 내세워 과감히 두 번째 우리 집 근처의 독서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밥은 먹고 다닐 수 있었으니 한결 나았다. 더욱이 끝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리고 나는 결국 학력고사까지 봤고, 재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불안에 떨며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결국 나는 2 지망에 합격했다. 이거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끝났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교과서와 참고서를 미련 없이 싹 다 버려 버렸다. 시골에서 아버지와 나무를 했고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부뚜막을 두드리며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를 외쳐 부르며, 그래도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이 ‘두 번째 우리 집’ 보다는 편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악필,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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