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드디어 작으나마 집이 생겼다. 새 집에 입주한 것이 작년 여름이니 벌써 1년이 지나간다. 사계절을 경험했고 만족감은 여전하니 집에 관해서는 이제 뭔가 이루려는 혹은 뭔가를 간절히 희망하는 등의 감정들은 시들고 심지어 사라지게까지 되었다. 내 집이 아닐 때랑은 이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집은 현대 사회를 사는 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큰 고민거리이고 거의 모든 경제 활동의 최종 목표이거나 반드시 갖춰야 할 관문처럼 여겨진다. 집이 없으면 불안하고 남의 집에 사는 개운치 않은 기분을 계속 느끼며 살아야 한다. 집이 없으면 우선 내가 맘 편히 있을 곳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일에 집중을 못하거나 우선순위가 밀린다고 생각되는 일에 제대로 맘을 쓰지도 못한다. 인생을 즐기는 것도 불안 속에 이뤄지니 제대로 즐겼다고도 할 수 없다.
물론 타고난 긍정주의자이거나 대인배의 경우라면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하는 맘으로 할 거 다 하며 살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일반인이야 어디 그런 맘을 쉽게 떨쳐낼 수 있었겠는가. 나 역시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집이 생기고 만족감을 눈에 띄게 드러내는 걸 보면 나 또한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걸 느꼈음이다. 그것도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과하다 할 정도의 만족감이니 유별나긴 했나 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건 탓하기보단 오히려 즐겁고 다행스러운 일인데, 과거 나의 살던 우리 집을 생각해 볼 때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집. 우린 그게 나 혼자 살던 같이 살던, 얹혀서 살던 자립 해 살던, 월세나 전세건 자가이건, 어쨌든 우리는 친구들과 헤어질 때, 모임에서 헤어질 때 모두 ‘우리 집’이라고 말한다. 그 우리 집은 내가 누워 자고, 내가 사적인 일을 도모하고, 내가 그나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말하기에 법적인 위상보다는 몸과 마음의 안식처라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집이 없는 노숙자와는 분명히 대비되는.
그러니까 한 50년 정도, 내가 살아온 우리 집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나의 지나온 날들에 대한 정리일 수도 있겠고, 세상에 던져진 나의 생존기가 될 수도 있겠다.
0 번째 우리 집
나는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이미 어딘가의 우리 집에 있었다. 그건 내가 태어난 첫 번째 우리 집 건너편에 있었고, 엄마는 뱃속의 나를 안고 논두렁을 힘겹게 건너 내가 태어난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0 번째 우리 집은 아버지와 엄마가 신혼집으로 살던 곳인데, 나의 두 형은 거기서 태어났고 거기서 죽었다. 영아 사망률이 높던 70년대 초반 얘기다. 혼인 후 첫 번째 자식을 갖지 못한 아버지는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주변의 의견을 듣고 집터가 안 좋아 그런 걸로 결론, 이사를 단행한 것이다.
첫 번째 우리 집
그러니까 여기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맞이한 집이 되겠다. 이곳은 유아 및 어린 시기를 거쳐 청소년 시기까지 가장 오랜 생활을 한 곳이다. 이 집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건이 한창이던 1950년대 중반에 할아버지의 주도로 가족들이 함께 지은 집이라고 한다.
분가해 살던 아버지는 집터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아마 - 안방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거하셨을 테니 - 그 옆 가운데 방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유아기 시절, 할아버지와 할머니랑 안방에서 잤고 할머니 품에서 할머니 입술을 만지며 잠들고 새벽에 할아버지가 일어날 때 나도 잠에서 깼다.
이 집에서 내가 태어난 지 3년 후 여동생이 추가로 태어났고, 그 뒤로 3년인가 4년인가 지난 후 남동생이 태어나려다 유산을 하게 된다. 엄마가 엠브란스를 타고 병원에 갔던 기억이 얼핏 나기도 한다.
내가 태어난 가운데 방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엄마랑 자다가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나는 내가 태어난 방을 독차지하며 책도 읽고 공부도 하게 되었다. 중학생 때 책상이 필요하다고 어렵게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허름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 책꽂이까지 달린 고급 책상을 사주셔서 당황하기도 했었다.
정면에 오서산이 보이고 왼쪽엔 뾰족 솟은 나름 큰 산이 있던 곳인데 위치가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다만 그만큼 비바람에 노출되기 쉬워서 나는 어릴 적 추운 집에 대한 기억이 많다. 겨울에 자고 일어나면 마루에 눈이 쌓일 정도였고 장마철엔 때때로 비바람이 몰아쳐 축축한 마루를 밟고 나와 신발을 신어야 했다.
그 마루에서는 뒷산 아래의 밭에서 키운 수박과 참외를 따와서 먹으면서 씨를 마당에다 그냥 뱉기도 했고 자다가 급하면 마루에서 저 멀리 오서산을 바라보며 그냥 마당에 오줌을 갈겨 싸기도 했다. 마당 너머엔 헛간이 있었고 그 옆엔 외양간, 그리고 뒤쪽엔 화장실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우리 집은 처음엔 초가집이었던 것이 붉은색 기와를 덥으며 나름 고풍스럽기까지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나름 손님도 많이 오고 서울에서 친척들이 오면 시끌시끌했었고 잔칫집 같은 분위기도 연출되었다.
우리 집은 뒤뜰에 대나무 밭이 있었다. 울창한 대나무 밭 사이에 들어가 아지트도 만들고 뭔가 놀이 거리를 찾으러 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손재주를 발휘해 그 대나무를 베어 활과 화살을 만들어 손자에게 주기도 했고 활쏘기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한 대나무살을 얇게 쪼개 연을 만들어 주시기로 했는데, 나는 그 연 만들어 날리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귀한 화선지 대신 신문으로 연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어지간히 연에 미쳐 있었다. 그 만든 연으로 집 앞에 논바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연을 날렸고 논두렁에 처박혀 연이 부서지면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들고를 반복했다. 지금처럼 종이가 풍부했다면 아마 달인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우리 집은 또한 집 앞에 논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있었다. 어릴 때 배운 실개천일 수도 있겠고 절대 강물은 아닌 조그만 상류천 정도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장맛철이면 나름 물이 불어 강물을 방불케 했고 날이 좋을 때는 나를 비롯한 동네 꼬마들이 물놀이하기 좋은 곳도 있었다. 그 냇물은 한 여름 고된 밭일을 마친 할머니가 저녁을 드시고 손자인 나를 데리고 가 같이 목욕을 하던 곳이기도 했고, 동네 친구가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놀 수가 없을 때 혼자 놀기 좋은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물고기를 잡으러 플라스틱 병을 잘라 어항(?)이라고 말하는 물고기 유인 장치를 만들어 며칠을 넣어 놓아 보기도 했고, 할머니가 쓰시는 곡식을 거르는 채를 갖고 온 동네 냇가를 휩쓸고 다니며 물고기를 잡아 보기도 했었다. 어항은 크게 실패했고, 그 채는 다 부서지고 아버지는 할머니랑 웃으며 아들 손자가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기도 했다.
한편 그 냇가는 나의 검정 고무신을 여러 번 휩쓸어 갔는데, 아버지는 고무신 장사에게 투덜투덜 대시며 아들 고무신을 연거푸 사줘야 했다.
또 우리 집 주변은 뒷산이 선산이었는데 조상들의 무덤이 있었다. 나름 널찍한 잔디밭이 형성되어 있어서 동네 형들이랑 친구들이랑 레슬링도 하고 씨름도 하고 축구도 하며 그 잔디밭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한때 이 마른 몸으로 군내 씨름대회에서 입상하여 선수로 발탁된 적이 있는데 아마 여기서 길러진 감각이 아니었을까. 저녁때가 되면 언제나 할머니가 “ㅇㅇ야!ㅇㅇ야!! 저녁 먹어랴!!”하며 외치는 소리가 알람 소리처럼 동네에 쩌렁쩌렁 울리기도 했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넘치는 에너지를 소진하며 배고픈지 모르고 놀았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뒷산에 밤나무와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할머니랑 가을이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밤 줍느라 바구니를 들고 뒷산에 가야 했다. 가끔 보는 뱀 때문에 기겁도 하면서.
주변환경이 천연 놀이터였던 우리 집은 그러나 지은 지도 오래되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더욱 관리가 안 되어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불편했는데, 흔히 말하는 푸세식 중에서도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겨울이면 벽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이 바람에 날려 없어지면서 엉덩이에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볼일을 봐야 했고 여름이면 수백 마리의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시끄럽게 날아다니는 파리들 틈에서 그리고 그 지독한 냄새 속에서 볼일을 봐야 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화장실을 보면 너무너무 감사하고 신기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행복이 극에 달하는 기분을.
한편, 우리 집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밥을 해 먹고 방을 덥혀야 하는 구조였다. 나는 특히 겨울에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철이면 아침부터 아궁이 담당을 자처했다. 물을 끓이고 소여물을 덥히는 것이 나에겐 그렇게 따뜻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초겨울이 되면 나는 항상 아버지를 따라 억새는 물론 솔잎과 솔가지 등을 집으로 부지런히 지어 날랐다. 따뜻한 아궁이의 장작을 보고 불멍을 하는 맛도 그만이었고 은행이나 밤, 고구마 등을 구워 먹는 맛도 있었다.
또한 겨울에는 집에 있는 펌프를 통한 지하수 조달이 안 되어 부득이 논 한가운데 있는 샘에서 물을 퍼 날라야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 아버지가 안 계셔 그땐 내가 짊어 날라야 했는데 보통 귀찮고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니 겨울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큰 행사였고, 신체검사 하기 전이나 학교에서 특별지시(일명, 때검사)가 있을 때는 나를 목욕을 시키느라 이만저만 번잡스러웠던 게 아니다.
참으로 옛날 얘기 같지만, 지금처럼 겨울에도 매일같이 샤워를 한다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던 그 시절은 불과 30년이 조금 더 지난 과거의 실제 있었던 일이다.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서 살면서 가장 충격적이자 비극적인 일은 내가 이 집을 떠나기 전 해 추석 전날에 일어났다. 당시 나는 도시로 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연합고사를 준비하던 중3 학생이었다. 추석 연휴 전날은 언제나 설레고 풍성한 날이기에 어떠한 나쁜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둑해져 저녁밥을 먹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윗집에 불려 갔다. 윗집에서는 팔이 불구인 아저씨와 술에 취한 젊은 그의 아들이 싸우고 있었고, 그 집 아주머니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쉬고 있던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험악한 분위기를 모르고 두 부자의 싸움을 말리던 아버지는 술 취한 매우 젊은 그 집 아들로부터 복부를 가격 당했고 아버지는 쓰러졌다. 근데 그게 그냥 참고 말 만한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아주 심각한 부상을 야기했다. 고통 속에서 아버지는 맨 땅을 기어서 기어서 2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 집 옆 마당까지 왔다. 희미한 외침 속에 나는 뛰어 나갔고 아버지가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계신 걸 발견했다.
그 뒤로 윗집의 큰 아들(가해자의 형)이 심각한 상황을 알게 되어 급히 병원으로 수송을 하게 되었다. 택시를 불렀는지 그 지역 사람 중 누가 운전을 해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에 집 전화로 수소문해서 가까운 병원부터 갔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먼저 갔던 병원에서는 상태가 심각하다고 해서 다시 다른 지역의 병원으로 갔고 거기서도 치료가 불가하다 하여 결국 대학병원까지 넘어 갔다. 그동안 아버지는 거의 사경을 헤매다시피 고통스러워했고 중3이던 나는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미성년자이다 보니 뭐라고 불평도 누굴 욕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학병원에 갔어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응급실에 갔지만 거긴 벌써 만원이고 피를 흘리며 들어오는 교통사고 환자들이 수시로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악 쓰는 소리가 들렸고, 그 혼란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일지 모를 치료를 마냥 기다려야 했다. 추석 전날이라 교통사고가 많았고 그 당시는 도로 사정이나 안전에 대한 의식도 열악해 응급실은 미어터졌다.
가까스로 순서가 왔고 아버지는 응급조치는 하게 되었다. 병원 수속 과정에서도 나는 아들로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아버지 옆에서 고통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고 마른 입을 젖은 거즈로 적셔 주는 정도였다. 밤을 거의 꼬박 세고 연락받고 친척들이 하나 둘 오고 아버지는 수술을 받으러 가고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오랜 수술 끝에 중환자실에 계시던 아버지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고 당시 초등생이던 여동생이 아버지를 간호하는 등 그 뒤 몇 개월은 혼돈의 시기였다. 아버지는 심각한 장파열에 간파열까지 되었고 상당 부분을 도려내야 했다고 한다. 그 뒤 한두 번 정도 더 수술을 하셨고 퇴원도 하셨지만 결국 비정상적인 합의와 불완전한 치료 때문에 아버지는 밭을 팔고 추가 수술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 나는 지서에 가서 사건 증언도 하게 되고 합의 과정에서 친척들의 고성이 오가는 모습도 목격하면서 복잡하고 긴장된 상황들을 여럿 겪어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주변의 불안한 상황들이 계속될수록 난 더 독기를 품고 공부를 했던 것 같다. 행여나 생길지 모를 실력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커다란 은행나무 옆의 그 고향 시골집에서 나는 중학교 때까지 생활을 했고, 결국 도시로 유학을 가면서 그 첫 번째 우리 집을 떠나게 되었다. (악필, 202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