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악필 Nov 06. 2023

[가족] 엄마가 요양원에 갔다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갔다. 좀 더 정확히는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맞겠다. 요양원 얘기를 했을 때 엄마는 절대로 안 간다고 틈만 나면 중얼중얼 반복적으로 얘길 했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요양원으로 보낸다는 것도 용기지만 그런 강한 거부를 듣고 설득해야 한다는 것도 참으로 곤욕스럽고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여 년 동안 여동생과 함께 생활을 해왔다. 여동생이야 그렇다 해도 매제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묵묵히 동생을 지지해 줬다.


지난 추석, 요양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엄마를 보게 되었다. 그전에 동생이 한두 번 면회한 거 말고는 처음 외박을 나오는 거였다. 엄마는 얼굴이 좋아 보였고 나름 요양원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놓이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다리에 힘이 없고 거동이 불편한 건 여전했다(이 점이 요양원에 보내드려야 하는 이유였지만).

그때도 하룻밤을 자고 나서는 얼른 들어가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 후로 한 달여 만에 휴가를 내고 동생과 함께 다시 엄마를 찾았다. 외출하고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엄마는 첨엔 아픈 사람처럼 모기 목소리더만, 점차 분위기가 익숙해지면서 원래 목소리로 돌아왔다. 얼굴은 좋았으며 전에 심했던 손떨림 증상도 줄어든 게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다리 힘이 없어 이번엔 휠체어를 빌려야 했다.


엄마는 집에 가 보고 싶다고 했다. 동생 집의 엄마 방이 그리웠나 보다.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포장해 동생집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가 매번 가던 식당에서 삼계탕을 포장해서 동생 집에서 맛나게 먹고 나니 엄마는 금세 집에 적응을 한 모습이었다.


식사 후 엄마는 본인이 아끼던 스카프며 손목 보호대며 옷들을 꺼내 보았다. 이건 옛날부터 엄마가 좋아하는 취미였다. 입지도 않으면서 구경만 한다. 막상 또 요양원에 스카프를 가져가려다가도 다시 생각을 바꿔 놓고 가기로 한다. 잃어버린다고. 그걸 몇 번 반복. 우리가 아는 엄마 그대로다.


국민(초등) 학교 2학년 운동회 때, 나는 학교라는 사회를 조금씩 적응해 나가던 시기였다. 1학년 때는 동네사람들과 아버지가 같이 나와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지만 운동회가 신나고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그러나 2학년 운동회 때는 아버지가 못 오시고 엄마만 도시락을 들고 왔다. 점심시간에 엄마는 교실에 와서 노란 도시락 통에 밥을, 작은 은색의 반찬통에 김치를 가져와 책상 밑 무릎에 두고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 어린 나이임에도 - 익숙해져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 보기에 너무 초라하고 안쓰러워 보여 교실을 뛰쳐나와버렸다. 엄마는 당황하여 나를 불렀고 난 못 들은 척 미친 듯이 달려 도망을 쳤다. 다른 친구들은 운동회가 신나고 즐겁고 어리광도 피우는 화려한 날이었지만 난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그게 또 창피했을 것이다. 점심을 굶었음에도 난 배고프지 않았다. 이게 내가 엄마한테 한 몹쓸 짓 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다.


엄마는 한국전쟁 때가 4살 정도였으니 한참 험한 세상에 유아시절을 보낸 셈이다. 기억도 없던 그 시기의 엄마는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외할아버지로부터 내던짐을 당하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래서 아마도 뇌나 몸의 어딘가 큰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정신적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겼을 수도 있다. 이 믿기지 않는 얘기에 엄마가 미친 듯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과거 어릴 적 다른 엄마와 달랐던 엄마의 모습들이 떠오르며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몸 어디에 장애가 있거나 자식들에게 전달될 만한 이상 유전자를 갖고 계시지는 않았다.

그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아버지와 엄마는 나에 비하면 얼마나 힘들고 억울한 세월을 산 것일까.


엄마는 이래저래 사회라는 세상을 전혀 모르고 살아온 셈이다.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다 보니 자꾸 사회랑 접촉할 기회가 없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사회와 격리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악순환.

그렇다고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서 며느리를 혹은 시골 아낙을 누가 배려하고 도와주며 사회에 적응하도록 독려했을까. 그저 활용하려고만 했고 구박만 했으며 엄마는 지청구만 노상 들어야 했을 것이다. 70년대가 그렇게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는 아니었을 테니. 내가 기억하는 80년대의 엄마는 여전히 사회생활이 어려웠고 낯선 상황에는 긴장과 두려움으로 몸을 덜덜 떨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사회생활에 대한 욕구가 없었겠는가.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고 누구로부터 인정도 받고 싶고 다른 사람과 같이 뭔가 하는 것을 계속 그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러다 보니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도 했고 그 결과로 주변에서는 더더욱 사회생활을 제한하는 악순환은 계속되어야 했다.

이를테면, 당시 유행하던 방문판매는 시골에도 있었는데, 뭔가 거래를 해보고 싶던 엄마는 아무 필요 없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장사치가 달라는 귀한 - 아버지가 아끼던 - 곡식을 덥석 주고 만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난리가 났고 엄마는 또 눈물과 울음이 가득한 밤을 보내야 했다.


엄마의 유일한 사회생활이라면 교회 활동이었다. 시집을 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교회 다니는 걸 따라 교회에 갔고, 집에서 ‘속회’라는 것도 하며 교회활동을 했다. 그래도 신앙인들이고 교회 참석자가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 그랬는지 나름 엄마한테 잘 해준 모양이다. 엄마는 예수에 대한 진정한 신앙심이라기보다는 그냥 버릇처럼 다니며 맞지도 않고 힘들어하는 교회생활을 한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골을 떠나 살 때 엄마는 교회에 대한 아무런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수많은 친척들이 교회 다니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교회에 가지 않던 아버지는 돌아가셨을 때 ‘성도’라는 글이 적힌 십자가 형상이 붙어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라고 할 밖에. 교인들이 대다수인 친가 쪽 친척들의 영향이겠지만.


그런 엄마가 요양원에 갔다. 이미 오래전에 허리도 굽어 이제는 걷는 것, 신발 신는 것, 화장실 가는 것조차 원활하지 않는 파파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더운 여름날 밭을 안 매어도 되고, 고추 안 따도 되고, 흥미도 재주도 없는 음식 만들기 안 해도 되고, 구박 안 받아도 되는 엄마는 어쩌면  이제야 가장 편하고 존중받으며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오히려, 처음 ‘주간보호센터’라는 곳을 갔을 때가 엄마는 큰 고통의 시간이었다. 주변 할머니와 어울리며 서로 배려하고 양보도 하고 말도 적절히 조심하고 하는 그 사회생활을 비로소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정해진 답대로 습관대로 행동하고 말하던 엄마는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 새로운 사회생활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혼란스럽고 어려웠을까.

엄마는 주변사람을 의식해 스카프 사달라 옷 사달라 안경 사달라 등 외모에 신경 쓰기도 했고, 너무 친절하게 하다가 갑자기 갈등 속에 휘말려 고민하기도 하고 누구랑 싸울 줄도 모르면서 누군갈 의심하고 피해의식 속에 살기도 하면서 혼란스러운 ‘주간보호센터’ 신고식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2년여 동안 적응을 성공적으로 한 것이다. 가장 우려한 일이 해결되어 감사에 또 감사를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기억력도 없어지고 정신질환은 좀 더 심해지고 멍하니 서서 가만히 있는 일이 자주 생기니 자연스레 요양원을 찾게 되었다.

즉, ‘주간보호센터’ 생활이 요양원 생활로 자연스레 연결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엄마는 요양원 생활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불가피함을 그 정신에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동생집에서 ‘주간보호센터’를 오가는 동안 불안하고 초조하여 동생을 힘들게 했던 때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식사도 잘하고 잘 주무신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허리까지 굽었으니 불편한 게 한 두 개가 아니겠지만 다행히 요양원의 관리는 세심하여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엄마는 정신/신경계통 질환 말고는 다른 속병(당뇨 고혈압 등)이 전혀 없다. 이 또한 복이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의 정신질환을 극도로 악화시킨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나의 고향 시골집은 할아버지가 전쟁 직후 가족들끼리 힘을 모아 지은 집이다. 처음엔 초가집이었겠지만 빨간색 기와를 덮어 나름 모양새가 나는 집이었다. 안방에서 나와 마루에 서면 멀리 오서산이 바로 보였고 산 너머 구름을 보고 비가 올지를 할머니는 알아맞히기도 하셨던 그런 집이었다.

그런데 그런 집이 어느 날 새벽 홀라당 불타 버렸다. 그게 그러니까 내가 회사에 입사해서 사원 연수를 받을 때였으니 벌써 20년이 훌쩍 넘어간다. 나는 마지막 연수 프로그램으로 금강산에 가야 했는데 그 전날에 화재 소식을 듣고 동생과 함께 시골에 내려갔었다.

현장에 갔을 때는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전기 합선에 의한 화재라고 했다. 나의 어릴 적 보던 책이나 사진들이 모두 타 없어져 정말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화재 당시 엄마는 새벽 교회에 가 있었고 아버지도 어딘가 가 계셨다고 한다. 다친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문제는 화재 원인을 조사하느라 부득이 경찰관이 엄마와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엄마는 어릴 적부터 받아온 공포감이었는지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아님 단순히 경찰에 대한 공포였는지 문을 꼭 걸어 잠그고(그땐 동네 사람이 내어준 임시 거처에서 지내고 계셨을 것이다) 강하게 면담을 거절했다고 한다. 경찰이 꼼짝없이 엄마를 잡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엄마의 공포감은 내가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엄마의 배경을 알고 나면 추측 정도는 할 수가 있다.


그때 엄마가 받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엄마를 정신적으로 더더욱 쇠약하게 만들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나중에도 불쑥불쑥 나타나 마음을 괴롭혔을 수도 있다.

물론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거의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울어 젖힌 걸 보면 그때도 못지않았을 수는 있다. 사실 또 기억해 보면 내가 얹혀살던 외숙모댁에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는 미친 듯이 울어 젖히느라 나는 진정제를 사러 약국에 달려가야 했던 적도 있다.

엄마는 약한 멘탈에 이래저래 정신적으로 힘든 경험을 많이 하면서 점점 쇠약해졌다. 허리는 더더욱 굽어갔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노화 증세도 심해졌다. 그걸 가끔이라도 챙겨준 게 이모다.


엄마의 가장 친한 대화 상대자, 큰 이모. 엄마를 요양원에서 모시고 나와 이모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순한 엄마는 그 순간에 더욱 고분고분해진다. 엄마는 이모 앞에서는 천상 아기다.

나와 동생은 이제 50 무렵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점점 어른이 되어 가는 반면, 엄마는 점점 아기가 되어 가고 있다. 엄마는 평생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할 줄 모르는 순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아기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순한 아기. 요양원에서도 그런 성정이 대접을 받는다. 엄마는 드디어 제대로 대접받는 시절을 맞은 셈이다.


이제는 손녀방이 된 엄마의 방에서 나는 낮잠을 잤고, 낮잠 같은 건 안 잔다고 한지 얼마 안 되어 내 옆에서 엄마도 낮잠을 잤다. 어릴 적 만지기 좋아했던 자고 있는 엄마 입술도 만져 보았다. 느낌은 그대로였다.

엄마. 엄마. 엄마. 내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많이 불러 보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나의 유아기를 주로 할머니가 케어한 데다, 따로 산 날도 많고 엄마를 부를 일이 별로 없기도 해서겠지만.


그래서일까 난 항상 엄마가 그리웠다. 뭐든 날 이해해 주고 내 입장이 되어 주고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엄마를 나는 항상 동경했다. 아내가 엄마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까. 난 아내를 그냥 ‘엄마’라고 부른다.


이제 진짜 엄마가 요양원에 갔다. 그 엄마의 입술은 옛날 그 느낌 그대로였다. 편안한 얼굴로 잠자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더듬어 보니 맘이 편해졌다. 나의 진짜 엄마. 다음번에는 엄마가 좋아할 만한 스카프를 사가지고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 (악필, 2023.11.6)

작가의 이전글 [가족] 빗속에 설악을 오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