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과 산행(20230812 설악산)
- 대상지 : 설악산
- 코스 : 오색-대청-천불동-소공원
- 일시 : 2023.8.12(토)
0930 남설악탐방지원센터
1245 대청봉
1344 중청대피소
1517 희운각대피소
1709 양폭산장
1838 비선대
1930 소공원
이번엔 설악산이다. 그동안 아들과는 비선대, 비룡폭포 및 토왕폭 전망대, 울산바위, 신선대 등을 다녔지만 대청에 오른 적은 없다. 무릇 청소년기에는 정상에 대한 욕구가 샘솟지 않던가. 지난번 한라산에 오르는 걸 보고 나도 자신감 있게 아들에게 대청봉 오르기를 권하게 되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었지만 아들과의 산행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양양으로 향했다. 양양의 아지트(C산방)에 도착하니 일찍 도착해 계신 분들은 아침을 드시고 계셨다. 아들과 주먹밥을 맛나게 먹고 오색으로 향했다. 오색까지는 J형이 편안하게 차로 데려다주었다. 대청을 넘어 소공원으로 가는 코스이므로 픽업&딜리버리 서비스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산행 멤버는 아들과 나 그리고 P형이었다. 오랜만에 산에 오셔서 다른 등반 코스는 안 가시고 우리랑 같이 하기로 하셨다. 사실 산에 많이 다닌 분들에게는 너무 단순한 코스여서 선뜻 선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J형도 충고했듯이 결코 쉬운 코스가 아니다. 하루에 오색을 넘어 대청을 찍고 소공원까지 하산하기는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대청을 하루에 소화하는 코스니 한번 도전할 만하다. 그나마 가능한 가장 단거리 코스.
산행 시작 전부터 하늘은 잔뜩 흐렸고 공기 중에는 습기 가득했다. 비가 온 뒤여서 계곡의 물도 넘쳐났고 나무들도 온통 젖어 있었다. 우리는 더운 여름에 그나마 잘 되었다며 긍정적 마인드로 산행을 시작했다.
오색에서 오르는 길은 시작부터 오르막이어서 대청을 향하는 사람들의 기를 죽였다. 사실 나도 이쪽으로 내려와 보긴 했어도 오르기는 처음이다. 아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럭저럭 잘 따라가고 있다. 오랜만에 오신 P형도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무색하게 매우 힘들어하며 오르고 계셨다.
중간중간 쉬어 가며 오르는데, 가끔씩은 고마운 내리막도 나왔으나 이 또한 그만큼 더 오른다는 얘기이므로 마냥 달가워할 수는 없었다. 땀이 비 오듯 하는데, 거기에 점점 더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젖은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축축해져 가는 몸을 느끼며 오름짓을 계속했다. 엄마(=아내)가 싸준 간식도 먹어 가며 오르는데 지침은 쉽게 가시지가 않았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온도는 좀 더 시원해졌고 빗방울은 그칠 줄 몰랐다. 바람까지 부는 걸 보니 정상이 멀지 않아 보였다. 아들 녀석은 힘들어하면서도 큰 내색 없이 나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말 없는 녀석이니 묵직해 보여 좋긴 했지만 한편으론 속을 알 수 없어 어떻게 대응할지 모른다는 어려운 점도 있다. 내가 어릴 때 그렇게 표현이 명확하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내가 감수할 일이다.
드디어 저 멀리 안갯속에서 대청봉의 표지석이 보였다. 아들을 앞세워 올라가는데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비까지 섞여 대청 오르는 날 치고는 참 고약했다. 그래도 정상인 것을. 아들에게 축하의 말을 하는데, 얼떨떨한 모양이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 따라와 줘서 참으로 대견했다. 뒤처져 있던 P형이 안 보여 기다리는데 한 10여분쯤 지나니 올라오셨다. 오랜만에 급경사를 올라 치니 힘에 부치셨나 보다.
정상에서는 비구름으로 가려져 경관은 볼 수가 없었다. 오직 안갯속 표지석만 증거물로 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아들에게 설악의 멋진 풍경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일생 최초로 대청봉 정상에 도달하는 뿌듯함은 안겨 주었다.
하산을 할 차례다. 애초 정상에 도달하고 컨디션을 봐서 오색 쪽으로 하산할지 천불동으로 갈지 선택하기로 했었다. 천불동은 하산이 훨씬 긴 반면 경사가 다소 완만하고 경치가 좋다. 그래도 하산시간을 치면 어려워도 오색이 나을 수 있다. 아들의 컨디션이 괜찮아 보여 천불동으로 과감히 결정했다. 다시 오른 곳으로 내려오는 것보다 넘어가서 보다 좋은 경치를 보여주고 싶었다.
일단 중청에서 중식을 하고 좀 쉬었다. 여전히 주변 경관은 안개로 뒤덮여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잠시 걷히는 듯하더니 다시 경치는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거기다가 하산을 시작하고 조금 있다 보니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져 있었다. 내가 아들의 한라산 산행의 모습을 보고 자신 있게 천불동 하산을 결정했지만 그는 이미 다리가 풀려 있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거기다 비까지 오고 있었으니 적잖이 당황했을 것 같았다.
비는 점점 폭우로 바뀌더니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할 때까지 나도 당황할 정도로 많은 비가 왔다. 갑자기 아들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남은 간식을 털어 먹고 좀 쉬기로 했다. 물도 보충하고. 비상식량 준비가 충분치 않았다. 그래도 남은 거 모아 모아 아들을 주고 물도 충분히 먹였다. 키르기스스탄 산행에서 사용했던 윈드와 오버트라우져를 입혀 보온을 유지하고 우중 산행에 대비했다.
다시 하산. 보통 나의 걸음이라면 3시간이면 충분해 보였지만 아들의 상태가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한 4시경 출발했으니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는 게 관건이었다.
아들 배낭을 내가 짊어지고 스틱을 주었다. 무너미고개를 지나 죽음의 계곡 입구 무렵까지 가는데 아들이 지쳐 보이더니 급기야 코피까지 흘리고 말았다. 빗속의 산행이 그에겐 많은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아들은 지쳐 있었다. 아빠로서 담담하려고 했지만,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완주했을 때 아들은 좀 더 강해지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 생각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아들에게 수분과 에너지를 최대한 보충하고 재정비해 다시 하산. 천천히 그러나 너무 쉬지 않으며 천불동 계곡을 내려갔다. 무당 폭포 등 주요 포인트에서 사진 찍기는 빠뜨리지 않았다. 아들은 아마 이때 정신이 없지 않았을까. 내려가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었고 주저앉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괜찮다며 호기롭게 파이팅을 외치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면 가고 쉬면 쉬고 사진 찍자면 찍었다.
양폭을 지나니 비도 이미 거의 그쳤고 날고 개어 주변 경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아들에게 좋은 경치를 보여줄 수 있어 좋았지만.. 그는 그런 감흥을 느낄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내려가서 살자! 는 생각일 것 같았다.
천불동 계곡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들의 속도가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았다. 악이었을까. 힘든 와중에도 야속한(?) 아빠를 따라 최선을 다해 걷고 있었다. 비명이나 아쉬운 한숨도 없이. 그렇게 그렇게 걸어 드디어 비선대 도착!
장하다 우리 아들! 속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날은 아직 밝았고 우린 해냈다.
와선대 무렵 계곡에서 세수도 하고 간단하게나마 몸도 씻었다. 코피도 좀 났는데 큰 무리 없이 해결되었다. 이제 소공원까지 편안한 걸음. 아들과 그 길을 나란히 걷는데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실컷 아들 자랑을 해주었다.
소공원에 도착하니 조금 있다 약속했던 대로 픽업 차량이 왔다. 30분쯤 전에 전화를 했는데 정확히 맞춰 오신 것. P형 형수님 차로 가는데 기분이 좋았다.
뒤풀이 장소에서 불고기를 먹는데 아들은 언제 그렇게 힘든 산행을 했었냐는 듯이 잘도 먹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스럽게 할 만했다고 한다. 주변 어른들의 칭찬에 나름 업이 된 듯도 했다. 아들의 뿌듯함이 살짝 엿보였다. 나중에 그가 이번 산행을 어떻게 느꼈는지 솔직한 심정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이제 아들과의 마지막 산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중1이니 때도 되었다. 근데 산행 후 1달쯤 지나 지리산 얘기를 했더니 크게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아들의 설악산 대청봉 산행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걸로 마무리하련다. (악필, 2023.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