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나의 여섯 번째 우리 집에 돌아왔을 때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황이었다. 떠난 지 대략 7달 만에 우리 집에 돌아온 것이었고, 그 과정은 힘들기도 재밌기도 지루하기도 괴롭기도 춥기도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힘들고 괴롭게 보낸 후 겨우 구질구질하게 손과 발에 붕대를 감고 돌아왔다.
나는 히말라야 등반 중 심한 동상에 걸려 귀국했고, 그 뒤 오랜 기간 병원을 돌며 치료하다 겨우 수술을 마치고 개강 전 집에 돌아온 것이다. 참으로 길고도 힘든 시간을 마친 셈이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방장(長)형이 졸업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때였고, 나와는 다시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산으로 떠나기 전 저질러 놓은 카드값이니 지급 못한 방값이니 여러 가지 뒤처리를 아무 불평 없이 해결해 주셨다. 나는 그 형의 졸업식에 직접은 못하고 간접적으로 꽃다발을 쇼핑백에 넣어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전달한 게 보답의 전부였다.
다시 돌아온 우리 집은 군대 갔다 제대한 동기가 마침 복학을 하면서 같이 살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친구는 나를 케어하기 위해 나랑 ‘살아 준’ 것이다. 그 친구는 나의 수강신청도 도왔고, 군대(방위) 있으면서 주말마다 산에 와 주었고, 병원에 있을 때도 어김없이 찾아와 주었다. (최근에야 알았지만 그 친구는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이미 우리 집에 방장형이랑 살았다고 한다)
나는 퇴원을 했지만 손가락과 발가락 일부를 절단한 상태여서 상처가 아물지 않았었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는 희한하게도 그럭저럭 남아 숟가락질을 하거나 똥을 닦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혼자서 온전히 일상생활을 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그 자취방은 나 혼자 살기에는 비용마저 부담되는 상황이어서 룸메이트는 절실했다. 친구가 그것까지 배려해 준 것이다.
나의 경제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산에서 다친 후 병원비 등 제반 비용은 선배들의 도움으로 해결했지만, 퇴원과 동시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지난 1년간, 상반기는 all ‘F’로 학기를 마무리했고, 하반기는 원정 등반으로 휴학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갔는데 결과적으로 (친구의 도움으로) 휴학처리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복학을 하려고 보니, 이미 받고 있던 장학금은 날아갔고, 큰소리치며 들어온 대학에 와서 더 큰 사고를 치며 부모님이 물려준 몸에 커다란 상처를 내고 나니, 낯을 들기도 손을 벌리기도 어려웠다.
더불어, 등산은커녕 운동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절뚝절뚝 걸어 다니는 신세가 되니 기분은 다운되고 세상은 온통 파란색을 띤 느낌으로 정말 우울함 가득한 시기였다. 도서관에서 보이는 북한산을 한숨 쉬며 올려다본 건 일상이었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했고,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았다. 현실은 냉혹했고 여전히 미래는 불안했다. 어쨌든 당장에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고 그건 더구나 히말라야의 추운 설벽 위 텐트 안 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 뻘 산악부 선배의 도움으로 등록은 할 수 있었다. 변변찮은 내 주변머리로 누굴 찾아가 부탁했을 리 없고, 그저 그분의 눈치로 알아서 도움을 주셨다. 나는 그렇게 또 대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군대는 재검을 통해 면제 판정을 받았고, 그해 여름 상처가 아물지 않은 곳에 재수술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갔다. 그 사이 나는 도서관과 우리 집을 다니며 가지 못하는 산을 그리며 살았다. 내가 있을 때는 그렇게 어렵더니, 동기들이 돌아온 산악부에는 활기를 띠었고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같이 하지 못하는 처지가 너무 괴로웠지만, 한편 또 그렇게 다쳤기 때문에 나는 군대에 있지 않았다. 세상은 오롯이 악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롯이 호재만 있는 것도 아닌가 보다. 그저 자기가 저지른 대로 고스란히 결과가 나올 뿐. 내가 예측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일은 그저 감수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실제로 뜻밖의 호재는 학교에서 처음 선발하는 총장님이 주는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상의 부상은 무려 남은 학기 전액 장학금이었다. 내가 선발된 명분은 처절하게 실패를 했지만 나름 도전적인 모습(?) 보였고 등반대의 유일한 재학생이었고 가난했으며 다쳤다는 거 정도로 추정한다. 더 정확하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냥 ‘불쌍해서’ 준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마저도 나는 교수님한테 주제도 모르고 거절하려고 했다. 다치고 몇 번 경험한 것이지만, 여러 사람 앞에 서고 나를 드러내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 또한 교수님의 설득으로 받게 되었다.
난 자꾸 스스로를 떳떳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겼다. 병적으로.
이래저래 난 대학을 포기하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이외에도 산악부의 다른 선배들도 물적으로 심적으로 많이 챙겨주었고 동기 후배들도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 점점 나는 상처도 아물고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나는 유쾌하려고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기간 동안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 보니 원활하지 않았던 일들도 당연히 있었다. 두 번째 수술을 하기 전일 것 같은데, 상처가 아물지 않은 발가락 때문에 항상 밑을 보며 걷는 버릇이 있었다. 피가 상처 부위로 쏠리는 일이 불쾌하기도 했고 혹여 예상치 못한 충돌이 생겨 상처가 악화될까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그러다 학교 내 매점의 복도를 걷다 문방구에서 열려 나오는 문에 이마가 부딪쳐 눈썹 부위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 손과 발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것도 흉한데 이마에까지 붕대를 붙이고 수업을 들으려니 여간 흉찍스러운 게 아니었다. 악재가 몰려오는 기분이랄까. 그저 받아들이고 수습해야 했다.
또한 친구와 같이 살면서 그 고마운 친구랑도 불협화음은 있었다. 얼마 전 그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거의 30여 년 전의 얘기를 했는데, 서로 웃으며 공감한 것이 뜻밖에 둘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살아보고야 뒤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나는 많은 부분 즉흥적이고 내성적인 반면, 그 친구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다른 친구들을 잘 챙기고 무척이나 계획적이었다. 더구나 나와 달리 너무 깔끔하게 사는 삶을 추구했고 뭐든 자기가 생각한 대로 일이 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였다. 이에 즉흥적이고 그다지 계획에 연연하지 않으며 내 생각과 다른 일을 남의 말대로 그대로 따라 하기 싫어했던 나와는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친했던 친구도 막상 살아보니 모르는 것이 있었던 것. 지금에야 MBTI 등 성향을 분석하는 내용이 많이 공유되고 나이도 먹어 적당히 세상의 여러 인간군상들을 만나 어느 정도 이해의 폭이 넓어져 있지만, 20대 초반의 그 나이에는 알리가 없었다. 힘들었고 갈등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결국엔 서로 의지하며 아무 일 없듯 살아갔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친구만큼 가장 친하고 서로 돕고 편하게 대화도 나누는 사이는 없는 듯하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 것일 수도 있고 서로의 성향을 알았으니 그만큼 감안하고 서로를 대하게 되어 그럴 수도 있다.
다시 우리 집에 돌아와 그런 하자 많은 몸과 맘으로 그럭저럭 10개월을 보내고 나니 나의 거취에도 변화가 생겼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구하게 된 것이다. 즉, 나는 여동생과 방을 구해 나가게 되었다.
학교 근처의 이 자취방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특히 내가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산악부 후배들이 만취해서 자러 오기도 했고 술집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많은 고민들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고 말이다.
생각보다 일찍 떠나서 아쉽기도 했지만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방과 같던 나의 여섯 번째 우리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또다시 이사를 갔다. (악필, 2023.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