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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Apr 08.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3

아홉 번째 우리 집


어느새 2년의 세월이 지나 여덟 번째 우리 집의 계약기간 만료일이 다가왔다. 당시로서는 나름 주거 환경의 개선에 초점을 맞춰 선택한 집이었지만 월세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전세를 알아보기로 했다.

당시 고금리였던 적금도 만료되고 추가 대출 여력도 있고 해서 살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전세를 구했다. 1층이었고 여동생과 둘이 살기 적당했다. 무엇보다 우리의 분수에 맞아 보였다. 전세에 의의를 두고 이사를 했다.


이제 회사생활도 안정이 되어갔고 월급의 맛도 익숙해졌다. 적당히 나 자신을 위해 투자를 하고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무렵 나는 너무 마른 몸에 문제점을 느끼고 살을 찌우기 위해 근방의 피트니스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하철역 근방의 쇼핑몰(세이브존)이 있는 건물 꼭대기층에 있던 곳이었는데 나의 첫 ‘헬스’ 경험이었다. 그동안 운동이라면 달리기와 산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는데 마른 몸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과감히 돈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아주 좋았다. 퇴근 후 쇼핑몰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로 위로 올라가 운동을 하고, 운동 후 다시 밥을 먹었다. 이렇게 2달 정도를 하니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살이 찌기 시작한 것. 운동도 재미있어 왜 사람들이 돈을 내고 운동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할 수도 있는 시점을 생각한 적이 있는데, 결론은 돈을 벌며 결혼 안 한 그리고 여자친구도 없는 상태의 기간이었다. 바로 이때가 그런 시기였다. 스스로 많은 것을 만끽하리라 생각했었다. 막연히 여자친구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나의 숙맥기질은 그 로망을 채울 만한 어떠한 진척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일단 어색하고 귀찮고 두려웠다.


운동하고 술 먹고 책 보고 비디오 보고 등등이 내가 하는 주요 활동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은 다시 산에 가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혼자서 가까운 북한산에 오르기도 했고 산악회 산행과 모임도 종종 참석했다. 회사에서의 불안한 상태로 인해 자리를 잡기까지 산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제 좀 여유가 생겼던 모양이다.


생활이 안정되는 느낌은 좋았다. 결혼에 대한 의무감이 삶을 짓누를 정도는 아니어서 이 또한 좋았다. 동생도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고 부모님도 정기적으로 찾아가며 삶의 균형이 조금씩은 맞춰져 간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니 나는 어느 순간 차가 있어야겠다며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운전은 내 삶과 먼 얘기라 생각했는데, 이제 가능할 수도 있는 얘기였고 어쩌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열심히 운전학원에 갔고 운전은 재미있었다. 어렵지 않게 면허를 취득했다.


하나씩 하나씩 사회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암벽등반도 다시 시작하며 재학시절의 감을 찾으려 노력했다. 뭔지 모르게 훨씬 여유롭고 즐거운 기운이 들어 산에서의 행복감은 더욱 높았다.


이사를 한 후 이듬해 승진 누락의 우울함을 달랠 겸 중고차를 구입했다. 260만 원 정도의 스틱 세단을 구입했는데 구입 후 일주일도 안 되어 90만 원의 수리비를 써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운전 미숙으로 후진하다 왼쪽 앞바퀴 위쪽을 찍어먹고 말았다.

그런 상처 투성이의 자동차였지만 초보자에겐 충분했고 운전은 재미있었다. 처음 도로를 나갈 때는 보험회사 전화번호를 옆에 두고 과감히 운전여행을 했더랬다. 몇 번을 했더니 운전이 많이 익숙해졌다.

이 차로 눈이 많이 내린 설 연휴에 13시간에 걸쳐 동생과 함께 시골에 내려간 일은 웃기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했다. 동생을 옆자리에 앉혀 지도를 보게 하고 나는 운전을 하며 길을 찾아갔는데 2시간 정도의 길을 그렇게 오래 걸려 갔으니 - 명절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 너무 미숙하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내비게이션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 얘기다. 그렇게 첫 차를 끌고 시골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 갔었다.


사실 승진 누락의 충격은 예상보다 컸다. 난 역시 아르바이트생이었어, 내가 들어올 데가 아닌 회사였어, 난 아무리 해도 그저 주변인일 뿐이야, 등 온갖 부정적인 멘트들만 떠오르고 마음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술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컴플렉스는 아직도 해소되기까지 먼 길을 더 가야 하는 느낌이었다.

주말에 자동차를 몰고 운전연습 겸 드라이브를 하며 그러한 현실을 잊으려 했고 산에 가면서 우울함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다 간 게 그 해 여름 일본 북알프스 산행이었다. 그리고 마침 휴가 첫날 일본에서 승진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게 뭐라고 많은 것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면서 산행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세상에 대한 자신감이 더 붙는 기분도 들었다. 동시에 과거 히말라야에서 겪은 부상과 그 후유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북알프스 산행은 말할 수 없이 행복했고 인생에서 맞을 수 있는 행복의 정점에 서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좋았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힘들고 우울했던 기억이 많이 치유된 것이 이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완벽하진 않지만 회사생활에 자신이 생겼고 나도 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 시기이다. 산에도 더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삶에 균형이 많이 세팅되어 가고 있었다. 결혼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그래서 새해가 되어 생각한 게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회사의 팀장님의 추천도 있고 해서. 그러나 그마저도 소득은 없었다. 재학시절 산에서 다친 손가락이 발목을 잡았다. 나는 결국 여기까지의 행복밖에 얻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결혼을 진심으로 포기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 그 손가락의 문제를 야기한 초모랑마 얘기를 쓰며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고 그건 분명 효과가 있었다. 본질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지난 일을 정리하다 보니 응어리도 점점 풀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글쓰기의 재미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니 작은 효과는 아니었다.

내 방에 설치된 PC에 앉아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과거의 기억에 빠져 한 문장 한 문장을 써 내려가는데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다. 글을 쓰며 혼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내 삶을 문장화하는 작업은 산을 오르는 것 못지않게 희열과 뿌듯함을 주었다.

책을 읽을 때도 세상일을 바라볼 때도 모두 글 쓰는 것과 연계시켜 보니 이 또한 재미였다. 이걸 왜 모르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글을 쓰면서 나는 더욱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싫어할 만도 하지만, 산 때문이라기보다 결국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가만있는 산을 탓할 것은 없었다. 나는 계속 산이 좋았다.


그해 여름휴가는 그래서 러시아의 엘부르즈(유럽 최고봉). 전년도 일본 산행 못지않게 너무너무 재미있는 산행이었다. 오랜만에 고소를 경험을 한 것도 좋았다. 그래 이렇게 그냥 살면 된다, 결혼은 돼야 하지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라며 결혼에 대한 체념과 내 삶에 대한 기대가 섞인 합리화로 삶을 위로하고 있었다.


엘부르즈를 기분 좋게 다녀오고 나서도 헬스장은 계속 다녔다. 그때는 회사 근처 피트니스센터를 다녔다. 기존에 다니던 헬스장에서 사기를 당한 뒤여서 산에 신경 쓰는 동안은 멀리하다가 아마 잘 나가는 회사 근처의 헬스장으로 장소를 바꿨을 것이다.

거기서 드디어 나는 골프에 입문을 하게 된다. 돈이 좀 들더라도 뭔가 배우고 싶어서였다.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고. 당시도 여전히 고급 스포츠였지만 결혼을 포기한 마당에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골프는 재미있었고 열심히 했다. 그러니 자연히 잘 되었다.


가장 큰걸 내려놓으니 인생은 자체로 심플했다. 그저 월급 타서 놀고먹고 쉬는 것이다. 마음도 편했다. 그냥 그렇게 내 인생은 정리되는 듯했다.


그러다 또다시 이듬해. 나는 중국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내가 뽑혀서 갔을 리는 없고 그저 선호 지역이 아니어서 내가 가게 된 것. 당시만 해도 중국은 여전히 ‘중공’ 시절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고 인기 없는 곳이었다. 결혼도 포기한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 못 갈 데가 어디인가. 나는 주저 없이 가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부서의 후배 중에 중국의 장래성을 예측하고 중국어를 열심히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회사에 지속적으로 중국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무산되어 퇴사까지 하고 결국 중국에서 근무할 수 있는 회사로 가게 되었다. 그 뒤로 불과 2주쯤 후 중국 갈 일이 생겼던 것이다. 세상은 노력으로만 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또 다른 추천 후배는 결혼 등 개인사정으로 안 간고 해서 내가 가게 된 것. 나는 졸지에 북경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고 나면 황사 먼지가 자동차 위에 그득 쌓이던 북경에서 3개월 파견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이사를 할 시점이 되었다. 사실 그전에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이사를 하고자 했으나 전세금이 빠지질 않아 1년이 훌쩍 넘게 더 살게 되었다가 이사를 가게 된 것. 친구의 추천에 따라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점프로, 확실한 도약을 한 셈이다. 외국물을 먹고 더 과감해진 것일 수도. (악필, 20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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