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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Sep 05. 2023

산행과 글쓰기

- 글을 쓰는 이유, 산행을 하는 이유

아내가 코로나에 걸렸다. 날마다 주말마다 나돌아 다니는 남편인 내가 아니라 집안에서 누구보다 조심하고 조심하던 아내가 걸린 것이다. 바로 아들과 신속항원 검사를 받으러 가니 둘 다 음성. 그러다 이틀 후 PCR검사를 하니 이번엔 아들까지 걸려버렸다. 우연인지 아닌지 산에 다닌 만큼 코로나에 덜 걸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돌아 다녀서 오히려 더 안전한 모양새도 되었다. 어쨌든 지난 주말은 꼼짝없이 격리 신세였다.


아내의 소감은 일상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것. 꼭 집을 나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한 방에 쳐 박혀 집안도 자유로이 다니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일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일상이 없어지긴 동거인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이 동거인은 주말에 산에 가고 산행기를 쓰던 일상이 깨진 게 큰 답답함이다. 깨닫는다, 일상의 소중함.


산행기는 산행을 한 후 그에 대한 얘기를 쓴 글이다. 그러니 산행이 없이는 새로운 산행기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오히려 그런 면에서 글의 컨텐츠는 매번 확실히 확보할 수가 있다). 근데 이미 관성이 붙어서인지 뭘 써야한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먼저 반응한다. 벌써 중독 되었나?


산행기에 관련해서 일찍이 등정 J형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산행기 뭐 별거있냐? ‘산에 갔다. 힘들었지만 좋았다.’가 다 아냐?”라고. 아무리 요리조리 생각해 봐도 그 틀을 깨기 힘든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는 듯했다(병원에서 물어봤다가 무릎을 탁 쳤다. 탁월하다). 그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뭐 그리 열심히 써 나갈 필요가 있는지. 그 병원시절에는 산행기를 쓰려고 애쓰는 지금의 모습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뻔한 얘기들일 뿐.


그런 생각이 조금씩 바뀐 건 2004년 북알프스 산행기 쓸 때 부터였다. 재학생 동계나 하계 후 장비 식량 등의 형식적 기록 말고는 제대로 산행기를 쓴 기억이 없다. 그 할 얘기 많던 초모랑마 등반이 끝나고서도 비정상적 마무리로 어정쩡하게 대략적이고 추상적인 감상만을 간략히 남긴 게 전부였다. 근데 불쑥 K대장 형이 그 많던 대원들을 두고 나보고 북알프스 산행기를 써 보라시니 용기를 내 꾸역꾸역 적어올린 게 산행기의 맛을 느낀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 산행 중 내가 제일 기분 좋아 하긴 했다ㅋㅋ)

쓰다 보니 정리도 되고 당시 기분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하고, 꽤나 괜찮았던 것 같다. 다들 지루해 하셨지만. 당연히 ‘힘들었지만 좋았다’구조는 여전했고 내가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다 쓰는 재미를 쫓게 되었나를 곰곰이 생각하며 지난날들을 더듬어 보니 씁쓸하면서도 웃픈(웃기지만 슬픈) 얘기 하나가 떠오른다.

 

2004년 여름의 뜨거웠던 북알프스 산행은 삶을 다시 사는 자신감을 느낄 정도의 멋지고 재미있는 산행이었다. 그때가 처음 승진을 하고 난 직후였으니 더욱 기분이 좋았고 세상이 온통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니 자연히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팀장님이 연말 덕담삼아 충고하며 말한 당시 유행이던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이를 해결해 보기로 한 것이다. 당시도 극단적 숙맥에서 벗어지지 못한 데다, 촌스러움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정상적인 교제는 불가할 거라 지레 짐작했음에 틀림없다. 돈도 버는 데 적극적으로 살자며.

의욕과 자신감이 넘쳐 3호선을 타고 화정에서 강남까지 1시간 반을 가서 당시 No.1이던 DO라는 회사에서 상담을 했다. 능숙하고 노련해 보이던 상담사를 봤을 때 결혼을 곧 할 거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기본상담 후 회원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작성해 달라며 서류를 주고 나가기에 최대한 솔직하고도 정성스레 작성해 나갔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상담사는 당황한 얼굴빛으로 중간에 들어오더니 회원관리 차원에서 나와 같은 손가락으로는 등록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충격이었지만 당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 1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비를 아꼈다며 마음 편해했는지도 모른다. 노련한 상담사는 같이 산에 다니는 여자를 만나는 게 좋겠다며 정중히 나를 달래서 돌려보냈다.

어떠한 진상짓도 하지 않고 무사히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츰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아주아주 특이한 소수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만큼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그 만큼 적은 선택의 폭 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나 이제 결혼 못하는 거야? 이런 제길!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내 인생 돌리도!’ 진심으로 결혼을 포기하며 집으로 오는 길은 참으로 길고도 긴 느낌이었다.

 

2005년 새해 첫 주중의 일이었으니, 새해부터 기분이 잡쳐버렸다. 아마도 몇 개월간 그 생각을 했다 잊었다를 반복하며 불안한 생활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래 근데 정말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 거지? 회사를 비롯 그 동안 만난 많은 사람들은 나의 손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던 걸까? 친한 사람이야 조심스레 ‘네 손이 왜 그러냐’라는 질문을 해왔지만 적당히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그건 이미 칠칠치 못함을 인정한 거라 봐야했다. 그 동안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정말 뭔가 명확한 답이 필요했다. 그들을 위해서라기보다 나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정리가 안 되는데, 이렇게 유약한 모습밖에 없는데 앞날을 어찌 살아갈까. 대책이 필요했다. 쓰기로 했다.


고민고민 하다 용기를 낸 게 2005년 5월 5일 시작한 초모랑마 이야기였다. 처음엔 그냥 정리차원에서 한 페이지만 쓰려했는데 자꾸자꾸 따지다 보니 산악부 들어오게 된 처음 계기부터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또 일단 한편만 작성하고 나머진 다음으로 넘기자고 한 게 여러 편으로 나뉘고 사람들의 반응들에 또 힘을 얻어 쓰다 보니.. 글쓰기가 재밌어져 버렸다.

퇴근하고 글을 쓰다보면 피곤한지 몰랐고 지하철에서도 가끔씩 회사에서도 주말에도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며 사는 생활이 즐거웠다. 책을 봐도 쓰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다보니 이 또한 색다른 맛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효과는, 번잡스럽고 뒤죽박죽이던 생각들이 정리되며 심적인 안정을 얻었다는 것이다. 다시 멘탈은 이전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글로 정리한 후 마음이 편안해졌고 다시 반복적인 후회나 회한을 갖는 빈도가 적어지게 되었으니 분명 전과는 달라졌다 할 것이다. 인생 참 모를 일이다. 산행기는 내가 간 산행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남한테 알려주는 거라는 관점이 이렇게 깨진 것이다. 산행기는 나를 위한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초모랑마 이야기를 끝내고 중국도 가고 결혼도 하고 육아도 하며 산에 못 다니다, 다시 나와 하고 싶은 거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는 건 좀 우습기도 하다. 사실 허리건강 차원에 서둘러 다시 산에 왔지만 제대로 산행기를 쓰며 과거에 못한 것들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이다.

 

산행이 없는 빈 주말을 보내며 떠오르는 생각은, 앞으로 1년, 5년, 10년, 20년 그리고 또 30년을 더 살아가면서 채워야할 주말 또는 세월에 산행과 글쓰기라는 두 바퀴의 조화로움이 필수적일 거라는 점이다. 산행 하나하나, 오름짓 하나하나는 우리의 삶 자체요, 행복의 원천이다. 계속될 수만 있다면 삶의 의미도 행복도 커질 것이다(사실, 보통은 뭔가 하는 데 있어 많이 할수록 비례적으로 행복이 커지는 대상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 산행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 글쓰기이고, 그 글쓰기를 뒷받침 해주는 게 또 산행인 것이다. 물론 실천을 위한 몸부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앞으로 6개월을 더할지 1년을 더할지 10년을 더할지는 알 수 없다. 마음만은 지속가능하도록 자세를 낮추고 멀리 봐야 할 것이다. 그저 재밌는 거니까, 노는 거니까. 산행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 산행에 더 좋은 컨디션으로 더 좋은 데를 가면 되고, 글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또 쓰면 된다. 산에 훨씬 더 많이 갈 거니까.


적어도 산에 다닐 몸과 마음이 있는 한, 8천미터 14좌는 못하겠지만 한국의 가 볼만한 산은 모두 다녀볼 것이며(기회 만들어 해외도ㅋ. 다행히도 갈 데는 무궁무진하다), 세계 명작은 못 쓰겠지만 그에 따른 산행기는 모두 써 볼 것이다(소질이 없으면 양으로 승부해야 한다ㅋ). 그리고 독자가 없으면 내가 늙어서 몇 번이고 다 읽어 볼 것이다. (포부가 너무 큰가?ㅋ)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럭저럭 하고는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하자는 차원이었다. 코로나가 어서 풀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좀 더 자유로이 산행을 하길 바란다. 물론 글쓰기도 빼놓지 말고. (악필, 2022.3.7)

2004 일본 북알프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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