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6

Jasper

by 악필

[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6


6일차 : Jasper


여유 있는 아침이다. 점심 이후 Jasper국립공원으로 출발 예정이라 오전은 자유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먹는 식사는 갈수록 맛이 나는 것 같다. 식량 담당자분들의 요리는 수준급이다. 특히 여사님들의 식량 관리와 요리 솜씨 그리고 주방의 체계적 운영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니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협조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 준비를 서로 도우려 한다.

어제 저녁 그렇게 먹어 놓고 또 맛난 김치볶음밥과 황태 미역국을 보니 군침이 절로 난다. 또 많이 먹었다.


7일간 강행군을 해왔으니 오전엔 좀 쉬고 싶었다. 밴프 시내 트레킹을 하러 가는 분들을 모셔다드리고 숙소에 와서 낮잠부터 잤다. 뒹굴뒹굴 한가로이 늘어져 있는 맛이 그만이다.

공식 산행 일정은 어제 마무리된 셈이고 이제 오늘은 Jasper국립공원에 가서 오로라 구경을 시도한다(그래서 오후에 출발). 좀 멀리 가긴 하지만, 즐거운 드라이브나 가벼운 관광 정도 되겠다.

편안한 일들만 남았으니 몸의 긴장도 풀어지고 그동안 봐왔던 비경에 히죽히죽 웃음도 나온다. 아! 이번 원정 참 좋다,고 문득문득 생각했다.


오전을 푹 쉬고 나서 점심을 먹고, 샌드위치와 간식을 챙겨 들고 각자 차량에 올랐다. 오늘은 전 인원이 같이 움직이므로, 차량 배치도 가족 위주로 하게 되었다. 크라이슬러, 시에나, 지프에 나눠타고 출발.


오로라를 볼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그렇다고 꿈마저 버릴 수는 없다는 게 대원들의 뜻이었다. 꿈을 좇는 과정, 이 또한 낭만 아니겠나.

기름을 가득 채우고 Jasper를 향해 달렸다.


밴프 국립공원에 들어서고 어제 갔던 Lake Louise를 지나 본격적으로 Jasper 방면 Canadian Rocky를 따라 달렸다. 눈은 조금씩 있었지만 운전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차 안에서 보는 풍경은 장난이 아니었다. 겨울 왕국을 가로질러 가는 느낌이랄까, 로키의 심장부를 지나는 기분이랄까, Jasper의 오로라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적당히 가다가 쉬기로 했다. Bow Lake. 날은 무지 추웠지만 주변 경관은 그걸 잊게 했다. 그리고 또 출발.

앞서 좋은 경치로 감탄을 연발하는 바람에 지쳐 버렸다. 그러나 로키의 비경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점점 더 더 더 좋은 경치가 펼쳐졌고, 나중엔 우린 웬만해선 감탄의 표현을 쓰지 않았다. 너무 상투적이라.


한 2/3쯤 가니 딱 멈춰 서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나왔다. Icefield. 마침 앞서 간 두 차량도 거기서 구경하고 막 나오는 중이었다. 저 깊숙이 빙하가 펼쳐지는데, 여름에도 녹지 않아 관광지로 유명하단다. 사진으로 장면을 남기긴 했지만 충분치 않다. 부랴부랴 그리고 꾹꾹 눌러 눈으로 담고 담은 뒤 마지못해 차에 몸을 실었다.

Icefield

Jasper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불행히도 우린 네비게이션을 볼 수 없었다. Jasper 가는 길은 통신 두절 구간이었다.

표지판을 봐 가며 그럭저럭 찾아갔다. 가면서 보니 죽은 나무 지대가 수 킬로미터가 이어져 있었는데, 최고참형은 산불 때문이다, 그다음 형과 나는 병충해 때문이다,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나중에 산불로 판명. (내내 찜찜해 하던 큰 형님은 나중에 다른 멤버들을 만나 하소연한 끝에 명확히 판명 받았다)

Jasper에 거의 왔을 때는 경치도 상대적으로 볼품이 없어졌고 날도 조금씩 어두졌다.

나는 Jasper로 빠지는 길을 놓쳐 한 20여 킬로미터를 더 갔다 돌아왔다. 전체 온 길이 한 300여 킬로미터가 넘으니 우스운 거리지만 말이다.


Jasper는 아담한 마을과 같았다. 관광지였지만 정감이 느껴졌다. 한 식당에서 일행들과 만나 간단 요기와 차 한 잔씩 한다. 앞 팀에서 조사한 바로는, 가뜩이나 보기 힘든 오로라인데, 날마저 흐려지고 있어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간 김에 기념품 가게에 들러봤다. 여는 곳이 몇 개 없어 들어갔더니 주인장이 한국인 여사였다. 아들과 협의해 컵 몇 개를 사고 나왔다.

Jasper

시간이 된 관계로 나는 우리의 키르기스스탄 형님을 픽업하러 먼저 캘거리 공항으로 향했다. 여기는 숙소보다 1시간을 더 가야 하니 대략 4~5시간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형님은 다행히 일이 일찍 끝나 오늘 밤 비행기로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차의 큰 형님만 다른 차로 모시고 미국 이민 1세대 형님과 멀대 부자, 이렇게 3명만 공항으로 향했다.

다른 팀들은 오로라는 못 보지만 간 김에 좀 더 Jasper의 밤을 즐기다 올 예정이었다.


Jasper 출발할 때부터 이미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날이 좋다는 예보를 근거로 오로라를 보기 위해 이날을 정했는데, 날이 가장 안 좋은 상황이 되었다. 어쨌든 눈보라에 눈길을 가야 했으므로 조심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한 지 한 30여 분쯤 지나서 차가 눈길에 살짝 미끄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밟다 떼다 하며 중심을 잡았다. 어두운 데다 눈길이니 매우 조심해야 했다. 이민 1세대 형은 혹시나 하고 뒤 팀에 메시지를 남겼지만, 통신 두절 코스라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지나다니는 차도 없고 어두운데 차량 불빛 사이로 쳐대는 눈보라를 볼 수 있었다. 천천히 갈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민 1세대 형님은 조수석에 타고, 아들은 뒷자리에 탔는데, 나는 형님이 살아온 일대기를 다 듣게 되었다. 대학 들어간 얘기, 취업해서 하게 된 일에 대한 얘기, 매킨리 원정 얘기,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된 얘기, 사업 얘기, 정착해서 살아온 얘기, 아이들 교육 얘기, 세상 얘기 등등. 나도 같이 50여 년을 살아온 것 같다. 얘기에 빠져있는 사이 형님은 그리고 나조차도 뒷자리의 아들을 깜빡할 정도로 아들은 조용히 우리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 실감 나는 현대사의 증언을 직접 들은 셈. 그렇게 우리는 지루한 줄 모르고 캘거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카톡을 하며 형님을 기다리는데, Jasper의 크라이슬러 팀이 안 따라온다는 시에나 팀의 전언이다. 그쪽에 통신이 안 되다 보니 답답함에 상황을 공유하는 차원이었다. 설마 눈길에 미끄러지거나 사고가 난 건 아니겠지, 하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한다.


드디어 공항에 도착한 형님을 만나고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며 있었던 얘기를 한다. 형님은 이미 너무 피곤해 보이셨다. 나도 하도 운전을 해댔더니 샌드위치가 꿀맛이다. 물로 입을 헹구고 있는데 또 카톡.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 어쨌든 숙소로는 가야 하니 공항을 출발하는데 이번엔 아주 보이스톡이 왔다. 마침 크라이슬러 팀의 한 형님이 상황을 알려주신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적당한데 정차를 하고 대기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시에나 팀은 벌써 숙소에 도착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크라이슬러 팀이 안 보여 걱정하던 차였고, 한참 후에 크라이슬러 팀의 부녀 두 명이 연락이 되어 상황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크라이슬러 팀은 눈에 미끄러져 차가 도로변에 박혀 있었고,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그 추위와 눈보라 속에 남은 멤버였다. 차는 그렇다 치고 사람들을 데려와야 했다. 하필 가장 연장자와 가장 어린 친구가 타고 있던 차량에 문제가 생겼다니 걱정이 더 커졌다. 신속히 시에나 차량을 현장에 파견하고 필요사항을 공유했다. 보험처리를 위해서는 렌탈 관련 서류가 있어야 함도 주지시켰다. 마침 렌탈을 해주신 미국 시민 두 분이 계셔서 신속한 대응이 되었다. 특히 우리의 키르기스스탄의 그 형님은 피곤함에도 사고 소식에 정신이 번쩍 드시는 모양이다.

한편 크라이슬러 팀의 두 부녀는 사고가 나고 이것저것 하다가 마침 오는 큰 트럭을 세워 얻어 타고 일단 통신이 되는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덕에 우리가 상황을 파악하고 조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낯선 땅에, 한밤중(밤 11시는 되었던 것 같다)에, 낯선 트럭을 대뜸 얻어 탄 거라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던지 형님의 멘트는 다급하게까지 들렸다. 그 두 부녀는 우리 지프 팀이 구출해야 했다. 다행히 통신이 되고 좌표를 받아 우리도 출발.


키르기스스탄 형님을 만난 후로 기다렸다는 듯이 상황이 급변한 것이 신기할 정도다. 형님은 예정보다 하루 더 일찍 돌아오신 건데, 오시지 않았다면 대응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천운이라 해야 할지.

지프 팀이 두 부녀를 찾아 출발한 지 얼마 안 있어 남은 크라이슬러 팀의 잔여 인원들은 또 다른 트럭을 얻어 타고 무사히 숙소로 복귀 중이라는 기쁜 소식도 들렸다. 이런 황량한 험지라서 그런가, 인도주의적 구조는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지프 팀의 역할이었다. 두 부녀를 만나 무사히 숙소로 가면 되는 것이다. 접선 장소를 재차 확인한 뒤 가솔린을 가득 채우고 북쪽으로 향하는데 눈보라가 심상치 않았다. Jasper에서 캘거리 공항으로 갈 때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도로의 눈이 강한 바람 때문에 쌓이지 않을 정도.

점점 더 올라갈수록 도로 사정은 더욱 안 좋았고 인가도 없었다. 곳곳에 바람이 끌어온 눈 두덩이가 있어 차는 러셀을 해 가며 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바람 소리와 차 불빛 사이로 비치는 눈보라가 무서운 상상을 하게 하기도 했다.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있는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는 구간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서로 말도 없이 긴장감 속에 목적지를 향해 갔다. 그렇게 그렇게 꾸역꾸역 접선 장소에 도착.


두 부녀를 만난 곳은 Jasper-숙소(캔모어)-캘거리공항 라인과 다른 제3의 장소였고 캘거리 공항에서 대략 3시간 거리였다. 간식거리와 음료를 먹으며 긴장을 풀고 나서 다시 출발.

우리 차만 제외하고 모두 다 숙소에 도착했다고 하니, 불안 요소는 많이 줄었다. 2차 사고가 안 나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지프 차량에 6명이 끼어 타서 다소 불편하기도 했지만 서로 만났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귀에 익은 올드팝을 선택했다.

긴장감에 졸지도 않았고 허리도 나름 버티어 주었다. 숙소까지는 2시간 반 정도. 도착한 시간이 대략 아침 6시. 밤새, 아니 하루 종일 운전한 모양새가 되었다. 부랴부랴 아침인지 저녁인지를 먹고 뻗었다. (악필, 20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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