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ke Louise
[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5
5일차 : Lake Louise
우리의 원정은 벌써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환상적이던 Ha Ling Peak와 꿈같던 Johnston Canyon을 마무리하고 나니 본전을 충분히 뽑은 기분이었고 여유가 생겼다.
오늘은 Lake Louise. 밴프를 간다면 좀 안다는 사람이면 누구든 언급하는 곳이다. 이번에도 산행팀, 빙벽팀, 탐방팀이 같이 모여 출발하고 각자의 코스를 가기로 한다.
Lake Luise는 Johnston Canyon보다 숙소에서 좀 더 먼 거리에 있었고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이제 밴프국립공원 가는 길이 익숙해졌다. 캐나다 도로의 운전도 적응이 되었다. 어제 급한 일이 있어 잠시 미국에 가시는 우리의 키르기스스탄 형님을 한밤에 캘거리 공항으로 모셔다 드리는 것까지 하고 나니 밤길 운전도 어색함이 없었다.
여름이라면 사람들로 북적였을 Lake Louise 주차장은 여유가 있었다. 겨울에는 더구나 주차비가 공짜. 세 대의 차량에서 내린 멤버들은 복장을 정비한다.
다른 계절이라면 에메랄드빛이 가득했을 Lake Louise 얼음 위에 쌓인 눈으로 온통 하얀색을 띠었다. 한쪽에는 눈을 치워 빙상장을 만들었고 그 위에서 누구는 스케이트를 타고 누구는 아이스하키를 했다. 과거 언젠가 김연아 선수가 티비 광고를 찍은 곳이라고 한다.
넓게 펼쳐진 호수와 그 뒤의 높은 설산을 보며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과연.
단체 사진, 개별 사진을 찍고 산행을 시작한다.
우선 빙벽팀은 Lake Louise 저 안쪽의 빙벽을 찾아갔고, 산행팀과 탐방팀은 트레킹 코스를 잡아 오르기 시작한다. 트레킹 코스 초입에 눈사태 경고 메시지와 함께 루트가 막혀 있음이 표시되었는데 어느 부분인지 명확지 않아 길이 나 있는 대로 오르기로 한다.
날은 갈수록 더 추워지는 것 같다. 널찍한 등산로 주변에 침엽수가 빽빽하게 그리고 쭉쭉 뻗어 있고 하얀 눈이 풍성하게 쌓여 그야말로 겨울 왕국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초반 30여 분을 오르면서 등산로에 이상이 없음이 확실해졌다.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탐방팀과 같이 오르면서 보니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된다. 최고참 형님은 80대의 몸으로 추위는 아랑곳없이 산행에 집중하셨는데, 한편으론 빽빽한 침엽수림으로 확 트인 Lake Louise 풍경을 감상하지 못하는 이 코스에 아쉬움이 많으셨다. 반면 손자 손녀와 함께 오신 엘브르즈의 형님은 한번 잡은 코스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어떻게든 오르시려 하시고.
큰 형님은 공항에서 휠체어로 이동하셨던 엘브르즈 형님이 걱정도 되고 나무 숲길을 언제까지 가야 할 지도 걱정되고 Lake Louise감상을 제대로 못할까도 걱정이시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브르즈 형님은 손녀의 보살핌을 받아, 아니 누가 말릴까 봐 저 앞서서 아무 말도 없이 오름짓에만 집중하신다. 묵묵히 이 모습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으시는 탐방팀 멤버들.
화장실 들렀다 오느라 늦어진 멤버가 오면서 이 장면을 뒤로하고 산행팀은 탐방팀과 헤어지고 부지런히 Lake Louise 오른쪽 봉우리(Beehive)를 오르기 시작한다. 탐방팀은 적당히 오르다가 하산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산행팀도 앞으로 어떤 경치가 나올지 코스가 어떻게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또 묘한 매력이 되어 호기심을 자극했고 계속 오르게 하는 힘이 되었다. 산행코스는 길이 잘 나 있고 편안했다. 주변에 쌓인 눈과 침엽수림은 계속해서 이어져 깊고 넓은 겨울왕국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 산행팀에는 아주아주 젊은 피가 수혈되었다. 엘브르즈 형님의 손자, 산행팀 지원. 아침부터 본인 의사를 명확히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손자는 그 또래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식성이 아주 좋았다. 탐방팀과 떨어져 3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간식이 거의 바닥날 정도. 사실 손자의 전략은 규율반장님의 비닐 쉘터와 그 안에서 먹을 라면을 먹는 것이었다. 혹시나 전략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 수시로 일정을 체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명랑하고 호기심 많은 손자는 유머감각도 있어 눈 위에서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보여주며 주변의 누나 이모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이렇게 저렇게 오르다 보니 깜짝 놀랄 풍경이 나타났다. Mirror Lake. 아담한 연못 수준의 호수였는데 역시나 얼음 위에 하얀 눈이 쌓여 있는 것은 앞서 본 Lake Louise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호수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우리를 압도하며 정말 만화 속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Big Beehive.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돌아가며 사진 찍고 호수도 밟아 보고 단체사진도 찍었다.
초반에 답답했던 풍경을 지나서 그런지 Mirror Lake의 풍경으로 앞선 모든 근심(?)과 불확실성이 일거에 제거되는 느낌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행여 탐방팀이 여기까지 올라온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코스로. 안내 지도를 보니 오늘의 코스가 대략 파악이 된다. 다음은 Agnes Lake. 오르는 길은 경사가 좀 급했다. 손자는 액션과 개그감을 발휘하면서도 걱정했던 거에 비해 곧잘 올라왔다. 흐리던 하늘은 또 맑게 개어 햇볕이 겨울 왕국을 환하게 비췄다.
급경사를 오르고 나니 대피소가 있고 그 옆을 보니 또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하게 넓고 큰 Agnes Lake가 보였다. 이 동네는 산에 오를수록 평원이 넓어지고 호수가 커지는 요술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만화 속 겨울 왕국이니 어련하랴. 어김없이 만세 샷.
산행팀장 겸 규율반장님은 대피소 앞에서 쉘터를 꺼내셨다. 오직 한 명의 관객이 온다 해도 그 관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명품 연극인의 직업정신처럼 우리의 규율반장님은 그 추위 속에서도 정성스레 그렇게 쉘터를 쳤고 자리를 정비하셨다. 그러다 가스불이 족히 1미터가 넘게 솟아 비닐 쉘터 지붕을 태우고 또 간신히 진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자연스레 연통이 만들어진 셈. 관객을 위한 준비에 집중하시다 정말 처음 보는 ‘불쇼’까지 시연한 모양새가 되었으니 호기심 많은 관객은 충분한 재미와 만족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또다시 추위가 들어와 연통을 수습하느라 우당탕탕.
그 관객은 역시나 손자. 그의 지분은 능히 90%는 더 되었다. 그 손자는 영혼까지 담긴 그 라면 맛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깔깔대며 라면과 차를 거의 다 먹을 때쯤, 밖에서 한국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설악산인 줄. 자동차 전문가 형님과 미국 이민 1세대 형님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나타나셨다.
근데 더 놀라운 건 엘브르즈의 그 형님. 휠체어 타고 공항에서 출입국 심사를 받으셨던 그 형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 자연스레 형님을 안고 축하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쉘터 안으로 모셨다.
탐방팀의 세 분이 오신 것이고, 그건 순전히 불굴의 의지와 포기할 줄 모르는 엘브르즈 형님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아님 손자를 보러 오셨던 것일 수도. 무엇보다 좋았던 건 탐방팀 모두 Mirror Lake까지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답답한 경관을 벗어나 깜짝 놀랄 경관을 보고 내려가셨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모두 대단하시다.
자리를 내어 드리고 산행팀의 일부는 다음 코스를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쉘터 쇼를 보여주신 규율반장님과 열혈 관객 손자는 새로 올라오신 탐방팀 멤버와 함께 남기로 했다.
쉘터 밖으로 나오니 손발이 시리고 귀가 떨어질 것 같았다. 마침 아이젠과 스패츠를 정리하려던 우리의 세 자매님들을 두고 나는 먼저 가서 기다릴 요량으로 아들과 함께 몸에 열을 내기 위해 앞서 출발했다. 구글맵을 따라 The Beehive(Big Beehive)로 향했다. 그렇게 호수의 오른쪽 길을 타고 10여분 정도를 가다 보니 러셀 자국이 끊겨 버렸다. 호수의 중간 정도 되는 위치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구글맵으로 러셀이라도 해서 가보려 했지만 시간상으로도 무리. 그래서 결국 백!
근데 이상한 건 우리 자매님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 화장실이라도 가셨나..? 호수에서 놀고 있으면 곧 나타나겠지, 하며 계속 The Beehive 갈 궁리를 했다. 최대한 가는 데까지 가 보기로. 가만 보니 발자국이 호수 위에 나 있는 게 있어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들과 함께 호수 끝까지 가서 오르막을 쳐다보는데, 눈도 많고 오르기는 역시 무리. 그나저나 호수 위를 걷는 맛이 그만이었다. 사진도 찍고 눈을 밟아 가며 노는데 신이 날 정도였다. 적당히 놀다 돌아가기로 했다. 자매님들은 아마도 우리가 진척 없이 호수에서 노는 걸 보고 더 이상의 산행은 포기한 거로 짐작했다. 마침 전화가 와서 하산한다니.. 역시나였다.
쉘터가 아직도 있었고 규율반장님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자매님들이 내려간 것을 모르고 계셨다. 이런.. 부랴부랴 쉘터를 걷고 짐을 챙겨 우리도 내려갈 준비를 했다.
다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자매님들 등장. 깜짝이야. 알고 보니 자매님들은 이정표를 잘 보고 원래 의도했던 Little Beehive를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었고, 나는 목적지를 잘못 알고 The Beehive만 바라봤던 것. 오로지 나의 완벽한 잘못. (전화는 Little Beehive에서 하산한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Little Beehive가 또 그렇게 좋다니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한다. 규율반장님도 첨엔 내려가려다 멀대 부자가 간다니 포기할 수 없다. 그렇게 길지도 않았고 역시나 오르고 나니 Lake Louise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하산이 그렇게 부담스러운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적당히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나서 하산.
결국 Lake Louise 딱 도달할 때쯤 시니어 형님들을 따라잡았다. 그렇게 길었던 하루 산행이 끝났다. 정말 환상적 경치로 하루 종일을 꽉꽉 채운 듯하다. 도대체 밴프, 비경의 끝은 어디인가.
먼저 간 빙벽팀 일행을 따라 남은 멤버들도 숙소로 향했다.
저녁은 두 번째 스테이크. 이번엔 자동차 전문가 형님이 전문 셰프가 되어 스테이크를 구웠다. 나도 아들도 목구멍까지 꽉꽉 채워 넣고 나니, 정작 이 환상적인 맛을 표현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셰프 형님은 준비 기간부터 코펠 밥을 잘 지을 수 있다는 얘기에 밥만 생각했는데 못하는 음식이 없었다. 누님 형수님들의 능수능란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랄까.
경치도 음식도 배가 너무 부르니 이제 좀 쉬어야 했다. 소화하는데 한동안의 시간이 걸릴 듯했다. 호수 위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악필, 2025.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