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ston Canyon
[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4
4일차 : Johnston Canyon
잠에서 깨니 숙취가 몰려온다. 그리고 깜짝 놀라 생각해 보니 어제 어떻게 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런 한심한..
마침 아침 메뉴가 떡국이어서 해장을 하고 오늘 일정을 시작한다.
오늘의 코스는 Johnston Canyon. 로키산맥 한가운데 밴프 국립공원 내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트레킹 코스다. 부담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에 사전 연구를 제대로 못한 탓에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코스 안내판을 찾아본다.
날은 예보대로 무지 추웠다. 어제 보다 더 추웠다. 반면 긴장감은 좀 덜했다. 오늘 산행팀은 물론, 탐방팀도 빙벽팀도 다 같이 출발하는 코스다.
지도상으로도 Lower Falls, Upper Falls를 지나 Ink Pots까지 길이 나 있다. 빙벽팀은 그중에 Upper Falls에서 빙벽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탐방팀은 컨디션에 맞춰 무리하지 않게 트레킹을 즐기면 되는 거였다.
추웠지만 바람이 없는 계곡길 코스라 어찌 보면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계곡길의 경치는 주왕산 계곡의 절경을 보는 것처럼 다이나믹했다. 계곡은 얼었고 눈이 쌓여 하얗고 그 사이사이 미처 얼지 못한 부분에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여름이었다면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로 에메랄드 빛의 풍성한 계곡물이 흐르는 전혀 다른 경치를 봤을 것 같았다.
트레킹 초반에 탐방팀과 섞여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니,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캐나다 깊숙한 숲속길을 설레는 마음으로 걷고 있는 저 멀리 아시아의 인디언 피부색을 지닌 일행들.
그러나 거기엔 빙벽을 하러 가는 아빠와 트레킹을 하러 온 어린 딸이 나란히 걷고 있고, 휠체어를 타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라온 호기심 많은 손자, 그리고 그 둘의 보호자로 나선 젊은 손녀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다.
또 룸메이트로 원숙미를 자랑하는 두 누님들이 두런두런 얘길 하며 걷고 있고, 한국에서 온 선후배들을 맞으러 미국에서 날아오신 분들도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을 형님들, 후배들에게 털어놓고 또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또한 다 성장한 딸과 함께 온 부부는 따로 또 같이 이 팀 저 팀을 오가며 챙겨 주기도 하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것처럼 못다 한 정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남남인양 말없이 걷다가도 항상 붙어 있어 헷갈리게 하는 멀대 부자.
다들 각자의 특색을 갖고 이 아름다운 숲속을 걷고 있다.
“Feel The Forest”
Lower Falls의 동굴과 에메랄드 빛 계곡물을 감상하고, Upper Falls의 빙벽을 구경하고 나서, 빙벽팀과도 헤어졌다.
이제 산행팀 6명이서 Ink Pots로 향한다. 목적지까지는 주차장에서 5.5Km. Upper Falls에서 대략 3Km를 더 가야 한다. 길은 잘 나 있었고 주변의 침엽수림은 우거져 명상하기 좋은 코스다. 고요하고 조용하다. 숲속의 치료를 원한다면 이곳이 바로 그럴 만한 곳이다. 마음도 몸도 싹 나아갈 것 같다.
Ink Pots 가는 길은 긴 만큼이나 사람들이 없다. Upper Falls까지만 가고 더 가긴 좀 부담스러워서다. 덕분에 아시아에서 온 인디언 빛깔의 우리들은 더욱 평화로운 트레킹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주변의 경치가 그리고 그 속의 우리가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어느새 숙취는 사라졌다.
숲길을 지나고 또 지나 Ink Pots가 갑자기 나타났다. 계속 오르막인 줄 알았던 길이 내리막으로 바뀌어 한동안 가더니 숲이 끝나고 갑자기 확 트인 평원이 나와 버렸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표지판이 안내한다. Ink Pots라고.
작은 연못들이 곳곳에 있고, 자세히 보니 그 연못은 푸른색을 띠고 맑은 연못의 바닥에서는 몽글몽글 땅을 헤치고 물이 샘솟는 것 같았다. 그 자체로 잉크병을 떠오르게 했다. 하튼 신기했고 꽤 올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사진도 찍고 연못 주변을 둘러보니 평원 한 복판에 마침 쉬기 좋은 조그만 벤치가 나타났다. 이제 목적지도 다 왔겠다, 할 일은 점심을 즐기는 것뿐이다.
우리의 규율반장님은 산행팀에서는 팀장 격이다. 코스에 대해서도 일정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해 오셨다.
우리의 규율반장님은 꿈이 있었다. 원정 준비에서부터 비닐 쉘터를 얘기하고 버너에 코펠도 얘기하시는 게, 밴프에서 한국의 문화를 시현하고자 하는 그런 꿈이 있었다.
규율반장님은 Ink Pots 평원을 보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이제 그 꿈을 펼칠 공간을 매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 사람도 없고 평원도 넓어 꿈을 실현하기엔 아주 적합해 보였다. 어쩌면 그 간절함으로 인해 밴프의 천사가 이런 적합한 장소를 마련해 주기라도 한 듯.
결국 벤치가 있는 장소가 누가 봐도 적당했다. 멈칫멈칫 주저하는 대원들 가운데에 비닐 쉘터를 꺼내셨고,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원들은 어떻게 하면 멋진 쉘터를 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스틱을 쓸까, 배낭으로 지지대를 할까..
춥기도 해서 내가 무심코 쉘터 안에 들어가 벤치에 앉고 나니 답이 보였다. 멀대 부자를 벤치 양 끝에 기둥으로 앉히고, 둘씩 바닥에 간이 의자를 두고 앉으면 벤치는 식탁이 되었다. 쉘터는 적당히 자기 몸 뒤로 깔고 앉으면 훌륭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버너를 켜고 라면을 끓이고 식사를 나눠주는 모든 일을 규율반장님은 혼자 주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탄을 금치 못하는 대원들과 라면을 먹는 행복한 모습을 보고 커다란 성취감을 느끼셨다. 꿈을 이룬 것이다.
어쩌면 쉘터와 라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승리감까지도 느끼셨을 듯.
아닌 게 아니라 그 준비과정의 번거로움을 잊게 할 만큼 아늑했고 재미도 있었다. 적당히 라면과 코냑과 커피까지 탈탈 털어 먹고 가스를 다 쓰고 나서야 일어났다.
흐릿하던 하늘은 점점 맑아 햇볕이 평원에 환하게 내리비쳤다. 콜럼버스가 나타나기 전 인디언 마을이 이곳이라면 어울릴 듯했다. 말의 풀을 먹이기도 움막을 치기도 좋은 곳이었다.
배도 부르고 탁 트인 공간에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로키의 봉우리들을 감상하고 있으려니 참 행복이 지금 여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떠나야 하니 사진 찍고 하산. 눈 쌓인 고요하고 평화로운 숲길을 또다시 걸었다.
빙벽팀은 마침 등반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있었고, 탐방팀은 일찌감치 하산을 완료한 상태.
또 누군가는 두런두런 얘기하고 누군가는 말 한마디 없이 누군가는 멍 때리며 그저 자기 스타일대로 하산하며 숲속의 힐링을 마쳤다.
숙소에 와서는 저녁으로 두툼하게 다진 고기를 넣은 햄버거를 먹었다. 그러고 나서 원정의 중간 정리와 상호 소통을 위해 간담회를 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원정을 즐기고 있었다.
날씨 예보가 좋은 하루를 정해 Jasper국립공원에서 오로라 구경을 시도하기로 일정을 조정했다.
각 팀별로 에피소드도 공유했다. 이번 원정을 통해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어느새 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서로에 대해 배우고 느끼며 성장하고 있었다.
먹는 거 빠진 거 기억할 거 등에 대한 의견을 공유한 뒤 내일, 그 유명한 Lake Luise에서의 환상적인 산행을 꿈꾸며 하루의 공식일정을 마무리했다. (악필, 2025.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