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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3

Ha Ling Peak

by 악필

[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3


3일차 : Ha Ling Peak


오늘은 하링피크(Ha Ling Peak, 2,407m)에 가는 날이다. 아무리 숙소가 좋고 음식이 맛있다 해도, 우리의 목적은 산행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One Thing’을 꼽으라면 단연 하링피크다. 그래서 이미 국내에서부터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많이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엄청 추워진다는 예보를 보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속옷부터 모자 장갑까지 복장은 물론, 아이젠 스틱 그리고 핫팩까지 장비도 빠짐없이 준비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8시 무렵 차량에 올랐다.


산행팀 9명 전원이 나섰다. 크라이슬러와 지프를 나눠 타고 하링피크 초입 주차장으로 향했다. 우리 숙소가 있는 캔모어에서 40여 분만 가면 되니 매우 가까운 편. 이번 원정의 주제곡 격인 존 덴버 형님의 음악을 들으며 눈 쌓인 도로 위를 조심조심 달렸다.


거의 도착할 무렵, 산양으로 추정되는 동물이 도로 중앙에서 한가로이 서 있었다. 차가 바로 옆까지 가도 놀라거나 행동의 변화가 없다. 묘하게 무시당한 기분. 모든 멤버가 신나게 사진을 찍고 나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날은 흐렸다. 그러나 저 멀리 하링피크 건너편 봉우리들 위에 달이 떠 있는 걸 보니 날이 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은 예보대로 추웠다.


정비를 한 뒤 사진 한 장 찍고 얼른 초입을 찾아 나섰다. 미적거리다간 몸이 식어버릴 것 같았다.

봉우리 방향으로 눈길을 따라가다 보니 하링피크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왔다. 안도.

그러고 보니 쭉쭉 뻗은 침엽수들이 즐비한, 영상에서 본 익숙한 장면이 펼쳐졌다. 몸의 열도 낼 겸 좀 속도를 내어 걸었다. 후미에서 천천히 가자는 민원을 고려 등산로가 확실히 잡혔다고 생각되었을 때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산길은 이미 여러 사람이 다녔는지 잘 다져져 있어 러셀은 필요 없었다. 원정 전에 걱정했던 폭설이나 눈사태의 위험은 거의 안 느껴졌다. 이것도 온난화의 영향일지 모르겠다.


한참을 또 침엽수림 사이로 오르는데 눈길의 경사가 조금씩 높아져 아이젠을 하기로 한다. 각자 아이젠 착용.

그리고 계속해서 지그재그형 산길을 올랐다.


산행 시작 40여 분 정도 지나니 저 멀리 설산이 멋지게 펼쳐져 있었다. 달이 보이던 하늘은 맑게 개어 더 멋진 경관을 보여주었다.

수시로 사진을 찍어가며 맑고 깨끗한 캐나디안 로키를 만끽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경치는 훨씬 다채롭고 넓게 펼쳐져 구경하고 사진 찍느라 걸음을 멈추는 일이 잦았다. 이제 몸도 산에 적응이 되었는지 적당히 열도 나고 경치까지 눈에 들어오니 신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산행은 잘 될 것이고 엄청나게 멋있을 것이다.


산 중턱임에도 경치가 너무 좋아 단체 사진을 한번 찍고 가기로 한다. 다시 침엽수 산길을 가다 보니 출출해졌다. 비경에 배고픈 줄도 잊었었나 보다. 적당한 숲속 공터에서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두런두런 수다도 떨며 여유를 즐긴다. 주변을 보니 길이 아닌 숲속은 무릎까지 눈이 쌓인 걸 알 수 있었다. 날은 더더욱 맑아지고 있었다.


다시 출동. 우리가 쉰 곳은 거의 마지막 숲속이었던 것 같다. 조금 지나니 계단이 나오고 나무가 없는 휑한 공간이 시작되었다. 팀버라인.

그리고 사실상 진정한 경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이제 완전히 개었고 하늘은 진정한 하늘색을 띠었으며 살짝 스치는 듯한 구름은 맑은 날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었다.

키르기스스탄의 우리 형님은 그 원정 당시 시차와 고소로 고생하셨던 한을 풀듯 앞으로 쭉쭉 나가며 선두에 섰고, 빨간색 학교 잠바를 공항에서부터 입고 오신 큰 형수님은 그 뒤를 따르며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40여 년 전 등산부 지도와 1학년 모습의 재연일까.

요가를 즐겨하시는 형수님은 잠시 다리에 쥐가 나서 조치가 필요했는데 예상대로 금방 나아지셨다.


장갑에서 시린 손을 꺼냈다 끼었다 하며 사진을 찍던 나는, 이번 원정에서 테스트해 보기로 한 블랙다이아몬드의 거대한 오버미튼(벙어리 장갑)을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고 누누이 생각했다. 나의 핸디캡을 제대로 커버해 줬던 것.

그럼에도 날이 얼마나 추운지 잠깐잠깐 사진 찍느라 속 장갑을 낀 채 손을 빼면 그 순간부터 손이 시렸다. 몸에서 나는 열과 밖의 온도차로 나의 윈드와 경량 패딩에는 서리가 잔뜩 끼기도 했다.


그래도 본색을 드러내는 압도적인 경관은 추위도 손 시림도 잊게 했으며, 그저, 야,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를 속으로 연신 반복하게 했다.

아들은 평소에 운동을 그렇게 하더니 드디어 그 몸을 쓰게 되어 기쁘다는 듯이 지친 기색 없이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눈 쌓인 너덜지대를 오를 때는 거의 히말라야를 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로 새로운 경치의 국면을 보여줬고 기분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요런 순간 무지 설레고 즐겁다. 희한하게.

적당한 데에서 아들에게 스틱을 쥐어주었다. 바람이 불어 혹시나 중심을 잃고 넘어질까 걱정도 되었기에. 스틱이 있건 없건 아들은 그냥 막 갔다. 뒷모습만으론 재밌어하는 건지 힘들어하는 건지 악에 받쳐 가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좀 더 지나서 고글도 씌어 주었다. 도수를 넣은 가벼운 고글은 미처 해주지 못하고 투박하고 무거운 스키 고글을 줬는데 막상 쓰고 나니 얼굴 반 이상이 가려져 표정은 더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바람도 불고 눈도 부신 상태라서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역시나 아들은 마구마구 올랐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먼저 가던 아들을 추월해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이제 거의 정상. 말안장과 같이 생긴 지역을 올라 피크에 도달하면 하링피크. 빨간 옷의 형수님은 빨리 정상을 보고 싶으셨는지 저만치 앞서 가더니 정상에서 환호를 하고 계셨다. 멀대 부자도 어느새 정상.


근데 이게 웬일인가. 정상에 올라 두 손을 번쩍 들어 환호를 지르려는데 정상 너머 보이는 캔모어와 그 뒤 로키산맥 설산이 갑자기 훅 나타나며 숨을 멎게 했다. 더불어, 하링피크을 중심으로 주변 사방의 전체 경치가 눈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압도당했다. 깜짝 놀랄 만한 경치. 그냥 환호로는 이걸 담아내지 못한다. 비명이라도 질러야 할 판. 아, 표현의 한계를 느낀다.


나는 순간 보았다. 반 이상이 비니와 고글에 가려진 아들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과 함께 처음 보는 경관에 감격하는 모습을. 작지만 절대 감출 수 없는 환호를. 우린 정말 잘 온 것이다.

마침 올라오신 키르기스스탄의 그 형님께 새삼 감사 인사를 드렸다. 형님 덕분에 이런 경치를 다 보네요, 감사합니다, 하고.

계속 올라오는 90년대 추억이 많은 누나도 우리의 규율반장님도 꾸역꾸역 올라오시는데 같이 해줘서 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리고, 시작부터 아름다운 부녀지간의 모습을 보여준 전 식량 대장님과 그의 딸. 딸은 좋은 아빠를 두었고, 아빠는 아주 긍정적이고 밝은 딸을 두었다. 그리고 여유 있는 우리 등반 대장.

밴프가, 아니, 온 우주가 우리가 있는 하링피크에 중심을 둔 것 같았다.

정말 미친 경관이다. 그 옛날 손발에 동상이 걸린 채 내려다보던 히말라야의 경관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냥 흰색 검은색 그리고 하늘색만 있는 히말라야보다는 나무도 마을도 강도 흰 산도 파란 하늘도 다채롭게 보이는 여기 하링피크에서의 경관이 더 멋져 보였다. 심지어 난 멀쩡했고 또 좋은 대원들이 있으니 외롭지 않았다. 행복했다.


단독 사진도 찍고, 부자간 부녀간 동료 간.. 하여튼 여러 조합으로 신나게 기념사진을 찍었고, 마침 올라온 현지인에 부탁해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근데 아무리 당시 사진을 봐도 현장의 기억을 한참 떠올려야만 그 감동이 되살아난다. 사진은 그저 미미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멋진 풍경을 다 담을 수 있단 말이냐. 시각적 풍경 말고 우리가 느낀 바람과 우리가 들은 환호와 여러 소리들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때의 기분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자, 이제 그만하고 내려가기로 한다. 몸도 추워지고 휴대폰 배터리도 방전이 되었다. 그래도 뭔가 좀 더 해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그 아쉬움 그대로 안고 내려가기로 했다.


흥분을 조금씩 가라앉히며 하산을 하는데, 새들(Saddle)의 중간쯤에 오니 문득 현지인이 설명해 준 하링피크 반대편 봉우리가 떠올랐다. 아쉬움마저 없애려는 생각에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면 될 듯해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시 그 현지인이 얘기한 대로 발자국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Miner’s Peak. 여기 오르는데 캔모어 방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귀를 때렸다. 진정 히말라야 설산을 오르는 기분. 아들은 설산만 보면 발걸음이 빨라지는 아빠를 보며 의아해했겠지만, 등반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전 식량 대장님은 딸을 내려보내고 우리를 따라오면서 춥다고 소리를 쳤지만 우린 못 들은 척.

거의 다 올라오니 돌무더기로 적당히 피크임을 표시해 뒀다. 그 옆의 피크도 있었지만 여기까지만. 춥고 힘들 만도 한데 묵묵히 따라와 준 아들이 고마웠다. 역시 사진 찍고 하산 시작(다행히 휴대폰이 다시 작동했다). 먼저 내려가 기다리고 있을 본대를 따라 열심히 내려갔다.


올라오며 간식을 먹었던 장소에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늦어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규율반장님이 원정 전부터 준비해 둔 비닐 쉘터를 치고 다들 편안히 식사를 하고 있는 걸 보고 안심했다. 우리도 부랴부랴 컵라면과 간식을 꺼내 먹었다.

헛헛하던 뱃속을 채우고 하링피크의 절경을 가득가득 마음에 담은 채 기분 좋게 그리고 여유롭게 하산을 시작했다.


혹자는 그랬다. 거기 그 추운 데를 왜 겨울에 가냐고. 여름에 가 본 사람들도 대부분 겨울에는 가는 거 아니라고. 밴쿠버에 사는 친구조차 얼어 죽을 만큼 추운 데를 왜 가냐고.

오늘 하링피크를 보고 나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뭔 소리냐, 밴프는 겨울에 와야 한다. 봉우리 하나를 오르는 과정에서 에멜랄드 하천(이 추운 와중에 출발 지점에 얼지 않는 작은 천이 있었다)도 보고 침엽수림 사이도 걸어보고, 눈이 너덜지대를 덮어 히말라야 같은 풍경이 연출되는 겨울에 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밴프는 겨울이라고.


마지막에 아들과 함께 하산하는데 여전히 좋은 경치를 보면서도 저 위 정상에서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경관을 본 기분이 새삼 들었다.


길고 긴 하산 끝에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꿈에서 깬 시각이 고작 오후 2시경. 하나의 계획이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불확실성이 확실함으로 바뀐 시점이기도 하다. 기분 너무 좋았다. 정상 부근에서 확인한 저녁 메뉴 카레가 벌써 기대된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경치 얘기로 다들 시끌시끌하다. 출발할 때 본 캔모어에서의 멋진 경치는 이제 매우 시시해져 버렸다. 도파민 분비는 멈췄고, 우리의 경치에 대한 눈높이는 이미 훌쩍 높아져 버렸다.


숙소에 일찍 와서 탐방팀을 기다린다. 맥주를 마시며 흥분도 가라앉힌다. 카레도 먹고 와인도 먹고 꼬냑도 먹고 럼주도 먹는다. 오늘 하루는 일주일을 경험한 것 같이 길게 느껴졌다. 다 하링피크 덕분이다. (악필, 20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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