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Sulfur
[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2
2일차 : Mt. Sulfur
캐나다에서의 첫날을 맞았다. 첫날인 만큼 가장 긴장되는 날이기도 했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차질 없이 진행해야 나머지 일정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시간관리를 잘해야 오후 일정도 무사히 소화를 할 수 있었다. 팀을 나누고 해야 할 일과 시간을 재차 확인하고 일정을 시작했다.
우선 우리의 식량 마련을 위한 식량구매조는 식량 대장(원래 식량 대장이 전권을 형수님께 위임하는 바람에 식량 대장이 되었다)과 회계담당, 그리고 멀대 부자가 지원을 위해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만져 보는 기계로 커피 내리는 역할을 자처했다. 누가 시키고 지휘할 것도 없이 다들 알아서 열심히 뭐라도 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식량 대장님도 수월하셨을 듯.
구수하게 끓여진 누룽지로 배를 채우고 길을 나섰다. 이번엔 공항에서 몰고 오던 차(Jeep)가 아닌 다른 차(Crysler)를 몰게 되었다. 출발하려는데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아 한 15분여를 헤맨 끝에 출발. 삐걱삐걱 어설픈 모양새지만 그렇게 또 살아가는 거 아니겠나. 캘거리 코스트코까지 그렇게 어설펐다.
코스트코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두 쇼핑 전문가는 물건을 찾고 고르고, 두 어설픈 멀대는 눈만 끔뻑이다가 부르는 대로 시키는 대로 여기 갔다 저기 갔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했다.
코스트코 쇼핑을 마치고 한인 마트까지 거친 후 숙소로 향했다. 전날은 밤에 오느라 몰랐는데 숙소 복귀하는 길이 그렇게 아름답고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신청자의 요청을 받아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와 이와 유사 노래를 들으며 직선의 하이웨이를 달리는데, 이게 사는 게 아니겠나 싶게 기분은 들뜨고 마음은 편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저쪽 캔모어와 밴프 방면에 길게 늘어선 로키의 하얀색 봉우리들만 보아도 이미 비행깃값 정도는 다 뽑은 기분이었다. 80년대 영화의 한 장면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여행은 이래서 좋은가 보다.
숙소에 돌아와 식량을 정비하고 잠시 쉰 뒤, 다른 대원들과 약속된 장소(Mt.Sulfur 곤돌라)로 향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밴프국립공원에 들어선 것.
국립공원 패스를 차에 걸고 멋진 로키산맥을 감상하며 가는데 눈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비경이 이어졌다.
모든 일행을 만나 곤돌라를 타고 Mt.Sulfur를 오른다. 시설물이 있으면 최대한 활용하는 게 효율적이다. 올라갈수록 눈이 쌓인 경치가 가까이 다가왔다.
곤돌라에서 내려서니 멋진 경치가 눈에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갑작스러운 비경에 늘 하는 패턴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비경이 있는지 모른 채.
사실상 여기서부터 겨울 왕국은 시작된다. 체감온도는 뚝 떨어지고 손과 발이 시려지기 시작한다. 모자도 쓰고 두툼한 장갑도 껴야 한다.
잘 정비된 길을 10여 분쯤 올라가자 또 비경. 그 뒤로 또 10여 분 올라가자 또 비경. 정상에서는 황홀한 경치가 그 많은 사람들을 압도한다.
경치도 봐야겠고 사진도 찍어야겠고, 눈도 바쁘고 손도 바쁘다. 부실한 내 손가락은 사진을 찍어주기보다 찍힐 것을 강요한다. Mt.Sulfur 정상이 우리 산악회로 가득하다.
개인 사진 단체 사진 끼리끼리 사진 셀카 사진 등등 다 찍고 어렵게 어렵게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추위가 큰 역할을 했다.
몸 사정상 정상까지는 못 올라오시고 내려가는 형님을 따라잡았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기다리며 같이 사진을 찍기로 한다. 형님은 20년 전 엘부르즈에서도 같이 산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심장이 안 좋은 상태로 산행을 했었는데 이번엔 허리가 안 좋으시다. 무려 손녀와 손자를 데리고 오셨다.
엘부르즈 당시 형님들을 보고 내가 앞으로 30년은 저렇게 다닐 수 있겠지, 했는데.. 수정한다. 지금부터 앞으로 30년으로.
정상에서 손녀는 세상 감동한 표정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했었다. 경관에 충격을 받은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걸 보면 이번 원정이 어떤 의미인지 대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거 저런 거 보면서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저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거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꾸역꾸역 돈 쓰며 이 추위를 극복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느끼고 감상하면 그만이다.
사진을 찍고 추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저곳 멋진 공간들이 있었다. 특히 옥상에서는 야외 난로까지 있어 추위도 녹이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준다. 간식도 먹고 커피도 타먹는다.
적당히 쉰 뒤 다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어떤 감흥이 있었는지 미처 체크를 못했다. 뭐, 좋았겠지, 추정할 뿐이다.
밴프타운 구경을 못한 일부는 시내로 향했다. 비지터센터에서 아들의 비니를 하나 사줬다. 잘 어울린다. 애초에 가져갔던 모자는 본인 스타일에 안 맞았는지 절대로 쓰지 않길래 내 비니를 줬는데 나를 위해서도 사줬다. 좋은 선택.
숙소에 돌아와 처음으로 샤워를 한 거 같다. 원정에 와서 샤워라니. 깔끔한 아들을 비롯 많은 분들은 이미 어제도 샤워를 한 모양이었지만 귀찮음 많은 나는 마지못해 한 모양새가 되었다.
숙소는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의 대저택 같았다. 거실과 부엌이 적당히 차이를 두고 있어 아늑한 거실공간이 이뤄졌다.
거실 침대에는 나와 아들, 벽난로 앞에는 우리의 규율 반장님 그리고 바닥에 매트리스 깔고 전 식량 대장님이 잤다.
2층에는 시니어 형님들과 손자가 적당히 나눠 잤고, 3층에는 숙녀분들이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지하 1층은 등반대장과 그의 딸이 자리를 잡았다.
샤워는 2층과 3층에만 가능해서 남녀를 구분해 순서를 기다려야 했고 따뜻한 물이 부족함 없이 나와 매일매일 깨끗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호화로운 원정이 아닐 수 없다.
버티다 못해 씻었는데 기분 좋다. 아들이 하는 건 다 따라 해야 한다.
저녁 메뉴는 스테이크. 스테이크는 요즘 말로 ‘개’ 맛있었다. 형님 두 분이서 추위에 떨며 구운 건데, 구운 지 시간이 좀 되어 차갑게 식은 스테이크까지 아들과 나는 싹싹 먹어치웠다. 와인 맛을 알아버린 아들을 보니 혹시 와인을 먹기 위해 고기를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도 뭐.. 어쨌든 뭐든 잘 먹으니 좋다.
다음 날 산행팀은 Ha Ling Peak, 탐방팀은 밴프 관광이 예정되어 있다. 그렇게 캔모어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냈다. (악필, 202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