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맞겠다. 우연과 우연히 겹쳐 만들어진 이번 원정과 원정 대원들.
산악부 재학생 시절, 가끔 OB/YB 합동산행이나 행사 시 가족들과 나오는 형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나도 언젠가는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면 또 운 좋게 나 닳은 아들이 생긴다면, 나란히 함께 산행을 하면 참 좋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게,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나, 점심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등의 원초적 삶 속에 방황을 하던 때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꿈이었고 충분히 허황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산악회 활동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물론 한때이겠지만, 가족과는 별도의 활동이거나 병행할 수 없는 생활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런 편견을 갖고 굳이 갈등구조를 만들어 고민하던 때도 분명 있었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면, 가정생활이 좀 정비되면, 경제적 기반이 좀 마련되면… 언젠가는 다시 산에 와야지.. 하며 말이다.
그래서 산에 가는 게 내 인생 전체에서 외도도 아니고 일탈도 아닌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며 바람직한 일인데.. 가족과 아이한테도 좋은 활동이 왜 될 수 없는가,라고 항변하며 굳이 또 그걸 증명하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지난번 키르기스스탄의 원정에서는 민폐의 소지도 있고 확신도 안 서 시도는 못했지만 이번엔 기회가 온 것이다. 아들과 함께 가보기로 했다.
키르기스스탄 원정의 대미를 장식했던 형님의 한 마디로 이번 원정은 시작되었다.
“이 회장, 캐나다 밴프라고 있는데, 다음엔 거길 가지!”
과거 후배가 이끈 재학생 원정 보고서를 보고 생각해 낸 것이라니 시작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1차 공지 후, 골수 멤버들 서넛이 뚝딱뚝딱 일정도 잡고 방향 설정을 하고 나니, 정작 빙벽을 할 만한 젊은 회원들의 참여가 없었다. 어차피 트레킹 팀도 별도 운영계획이 있었으므로 상관없다. 어쨌든 우린 간다.
1차 공지에 호응이 그다지 좋진 않았지만 일정 잡고 각자 티켓팅 후 좀 더 구체화하여 공지하니 꾸역꾸역 모아진 멤버가 최종 17명.
좀 더 가족적일 수 있게 아들, 딸, 손자, 손녀까지, 80대 할아버지부터 10세 어린이까지 다양한 세대가 되었다.
첨엔 그랬다. 이거 잘 갔다 올 수 있을까?
1일차 : 출국
장기간 자리를 비우니, 늘 하던 대로 전날은 회사 동료들과 저녁 자리가 있었다. 밥벌이는 곧 산행의 밑천이니 절대 소홀할 수 없는 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미 전날부터 아내가 준비물들을 거실에 늘어놓고 짐 싸기 좋게 해 놨다. 아들이 간다니 벌써 다르다. 본인도 그래야 멀대 같은 두 남자를 벗어나 친구랑 맘 편히 호캉스를 즐길 테니. 이거 선순환이다.
빙폭을 과감히 포기한 상태라 짐 싸기는 수월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아들과 나란히 가는데 신기하면서도 익숙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고 아들도 예상대로 말이 없다.
뭐가 빠진 게 없나 항상 걱정하지만 그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공항에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와서 식사 중인 분들도 많았다. 마침 아버지뻘의 80대 최고참 형님을 만나 사주시는 짜장면을 아들과 함께 잘 먹었다. 옆자리에서 힐끗힐끗 보는 것이 삼대가 어디 여행을 떠나는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에어캐나다 창구가 오픈되자마자 짐을 부치고 기념촬영. 환송 나온 가족들도 같이 찍으니 공항이 우리 우리 원정대로 꽉 찬 것 같다. 잘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다.
전원 티켓도 확인하고 출국심사까지 마쳤으니 원정은 이뤄지게 되었다. 이제 예약이 제대로 되었나 걱정할 필요도 없고 빠진 게 없나 괜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자, 이제 맘껏 설레어도 되겠다. 즐겨보자.
10시간여의 비행을 마치고 밴쿠버 도착. 공항 안에서 본 날씨는 첨엔 좀 흐리다 햇볕이 들더니 맑고 선명한 저 멀리 흰 산이 보인다. 또 설렘.
6시간 정도를 대기하는 동안 식사도 하고 낮잠도 자고, 또 어느 가족은 화투판도 벌이며 여행을 만끽한다.
캘거리에서 기다리실 형님들과 연락도 하고 점점 현실화되는 원정에 흥분되기도 한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 캘거리에 도착한다. 현지의 두 형님을 만나고 차량 렌트를 하고 숙소로 출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하니 밤 9시가 좀 넘었다. 예상한 대로 정확히 왔다.
숙소는 너무 좋았다. 우리의 키르기스스탄 그 형님은 어마어마한 숙소와 렌트비를 지원해 주셨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안전하고 깔끔하게 원정을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다.
각자 짐을 풀고 식량 대장은 부엌의 구조를 파악하고 식사 준비를 주도하고 그 지휘에 따라 젊은이들은 돕고 막내 어린이는 우쿨렐레를 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시니어 형님들은 내일 간식 포장과 이름표 작업을 돕는다.
형님 두 분이 장을 봐 온 음식으로 저녁식사. 잘 익은 닭고기와 또띠(?) 맛이 일품이다. 시작부터 식욕 폭발.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첫 밤을 보낸다. (악필, 202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