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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흐에게서 위안을 얻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by 악필


감상이나 느낌은 어떤 깊은 지식이 딱히 없다고 해서 혹은 그에 대한 사전 교육이나 깊은 사유가 없었다 해서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맘껏 주관적일 수 있어도 된다는 것 또한 감상이나 느낌을 맘 편히 생각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 수준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그림. 당연히 깊은 지식은 없으며 도파민이 샘솟을 만큼 어마어마한 흥미를 가진 적도 없지만, 또한 과거 몇 번 출장 중 유명 미술관을 방문하며 느꼈던 경외감 정도가 다였지만, 적어도 미술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기에 미술관에 가 보기로 했다. 고흐를 만나보기로 했다.


국내에서 유명 인상파 화가의 전시회를 보긴 처음이다. 오르세 미술관이나 내셔널 갤러리 등을 가면서 우리나라에도 미술관이 많은데 평소에 가지도 않으면서 해외에 가면 숙제처럼 찾아가는 게 스스로 이상하기도 했더랬다.

친구들 덕에 전시회 얘길 들었는데, 무려 ‘고흐’다. 해외 미술관에서 항상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막상 보러 가도 해외 출장 중이라 보기도 쉽지 않은 고흐. 마침 그 해외출장이 우리나라가 되었다. 진품 76 점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장소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1시간도 넘게 기다려 감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중학교 시절 그리고 최근 책에서 인상파 고흐의 그림을 본 적이 있기에 예상했던 대로 고흐가 그린 거 같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성의 두상을 묘사한 흑갈생의 투박한 유화로 시작되는 전시장은 해외의 공간을 떼어 온 것 같이 그럴싸했으며 인파들이 많아 오히려 그림을 세세히 볼 수 있어 좋기도 했다.


고흐의 그림은 붓터치부터가 거칠다. 피사체의 표정도 우울하고 밥벌이에 찌든 혹은 삶에 지친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어쩌면 문득 나의 모습이 정확히 비치기도 한다. 새롭고 즐겁고 익사이팅한 등산이나 달리기를 추구하며 환하게 웃는 나 자신을 만들어가다가도 불쑥불쑥 솟아 올라오는 우울함과 지침, 그리고 외로움들은 고흐의 그림과 닮았다.

교회에 모여 있는 사람들, 난로에 불을 피우는 노인, 난로 앞에 책을 읽는 노인은 고흐의 붓터치에 걸맞게 얼굴은 쭈글쭈글해졌고 표정은 한 없이 지쳐 보인다. 가난이 드러나 보이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 보이기도 한다.

여성들의 모습도 다를 게 없다. 바느질 하는 여성, 밭일하는 여성, 여러 우울한 표정의 여성 두상… 19세기의 풍경이라 더 처절해 보이는 걸까. 교육은커녕 온갖 성차별에 궂은일을 도맡았을 것 같은 여성의 지친 표정과 추수하는 모습. 모두 슬프고 고달파 보인다.

심지어 넝쿨에 둘러싸인 소나무 그림의 붓터치조차 그렇게 우울하고 슬퍼 보일 수가 없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그 우울한 색채와 붓터치의 그림들은 내 마음을 편하게 했고 내게 위안을 줬다. 19세기의 고달픈 삶은 왜 내게 위안이 될까. 어쩌면 누구도 정확히 말하지 않는 진짜 현실의 삶을 정말 공감할 만하게 말해줘서가 아닐까. 그래 이게 인생이다,라고 말이다.

인생은 언제나 우울하지도 않고 또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차지도 않지만, 우울하고 지친 우리의 인간적 모습을 이 보다 정확히 현실적으로 표현한 작가가 흔하진 않을 거 같다.


인상파 화가답게 누런색의 태양과 환한 세상도 보여준다. 그 밝은 태양 아래 어떤 왜곡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현실의 우울함과 지침도 보여주고 화려한 꽃의 아름다움도 보여주며 멋진 나무들이 서 있는 전원 풍경도 보여준다.


유화를 자세히 보면 붓질 하나하나가 그냥 그렇게 거칠기만 해 보인다. 그러나 두어 발 멀리 떨어져 보면 입체감이 살고 훨씬 현실의 모습처럼 보인다. 마치 곱고 고운 피부도 돋보기를 들이 대면 징그럽고 거칠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름답고 고운 세상만 찾아다녔다면 제대로 된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추함과 아름다움은 자체로 하나이고 추함이 조합을 이뤄 아름다움을,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에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고흐는 살아서는 작품을 한두 점 밖에는 팔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에 배어 있는 현실적이고 정확한 그 가난과 힘듦은 화가의 현실 그대로였던 셈. 나는 무척이나 공감되는 그림들이 많았다. 당 시대에 그림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림 속 가난의 모습이 구질구질해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그건 그만큼 현실과 다른 환상만을 찾아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후세라도 그 표현의 정확성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내가 이런 그림을 볼 리 없었을 테니.


정물화나 풍경화 속의 꽃이나 태양 그리고 풀과 나무들을 볼 때면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다. 힘들고 지친 세상을 버티고 견뎌 드디어 찾은 환희의 모습처럼 진하고 화려한 그러나 깊이가 느껴지는 모습은 아름다움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고흐전의 대표 작품인 자화상은 다른 그림과 섞여 전시되다 보니 그저 그런 평이한 그림처럼 보인다. 고흐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느끼다 보니 그 비싸다는 ‘착한 사마리아인’도 하나의 구성작처럼 느껴진다.

갤러리를 지배하는 그 강한 고흐의 터치. 진한 투박함. 배어 있는 인간적인 고독과 쓸쓸함. 왜 고흐전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지 알 만했다.


한 시간 정도를 감상하고 나와서 고작 5분여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다리가 아파온다. 그동안 아픈지도 모르고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악필,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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