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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먼히 May 02. 2021

새옹지마

0501

어젯밤 자기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요가 수업에 가기 위해 아침부터 지도를 보며 계획을 세웠다.

심카드를 사기 위해 먼저 월마트에 들러야 하고.. 그다음엔 큰길을 따라 쭉 걸으면 되겠지.

20분가량을 걸어 월마트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는데 하와이의 비는 마치 미스트 같다. 오긴 오는데 맞은 거 같지도 않다고 해야 하나. 그냥 촉촉하다. 월마트를 가는 길에 홈리스 같은 사람이 보인다. 무섭지만 안 무서운 척 당당하지만 겸손하게 지나간다. 새로운 곳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은 아무래도 행색에 따라 판단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의 안전을 위해서 아무렴 조심하는 것이 좋다.


월마트에서 내 최애 선크림을 겟하고, 심카드도 겟하고, 물도 잊지 않고 겟한다. 첵, 첵, 체크 모두 완성.

이미 덥다. 하지만 갈길이 멀다. 전날 밤 요가 선생님과 컨펌한 주소를 찾아 걷고 또 걷는다.

걷는 사람은 나뿐이다. 모두들 차가 있다. 30분가량 걸었을 무렵 요가 학원 근처에 도착했다.

아직도 수업 시작 20분 전이니 여유가 있다. 하지만 요가 학원을 찾을 수가 없다.

주소지 주변을 계속해서 돌고 돌았는데, 펜스로 건물들이 나뉘어 있어 도저히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로밍은 안 쓰려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잠깐 로밍을 켜고 내 위치 스샷을 요가 선생님에게 보내며 위치를 찾기가 힘들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약간 화가 났지만 감정을 빼고 팩트만 전하기로 한다.


로밍 데이터를 1분 켰을 뿐인데 kt에서 5500원을 사용했다는 문자가 온다. 다시 얼른 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으며 주변을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10:58.. 수업의 반이 지나려 한다. 

오늘 아침 나와의 약속이 무산되는 것에 약간 화가 올라온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화를 내서 무엇하리.

돌아가는 길에 길을 또 잘못 들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요가학원을 마주한다.

주소가 다르다. 요가 선생님이 주소를 잘못 알려줬으니 최소한 내 책임은 아니군.

내가 길치 거나 어리바리해서 길을 못 찾은 것이 아님에 왠지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전날 밤이라던가 출발 전 아침에 보다 면밀히 시뮬레이션을 돌릴 순 있었다.




요가 학원 문을 두드려 봤으나 자물쇠로 꽁꽁 묶여있었다.

요가 옆집에 물어보니 수업이 시작하면 문을 잠근다고 한다.

소심하게 문을 콩콩콩 두드려보다 집에 가서 요가 선생님이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셨는지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미 1시간 반가량을 걸었으니 요가 수업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셀프 위안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한다.



물도 다 마시고 나는 너무 목이 마르다. 심지어 배도 고프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는 체질인데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는 나뿐이다. 역시 다들 차가 있다.

렌트를 하고 사람답게 사는 게 나으려나 잠깐 생각한다.


요가학원에서 약 30분을 더 걸어 세이프웨이에 도착했다.

주스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 세이프웨이 옆에 약국이 보인다.

백신을 맞을 수 있다는 팻말도 보인다.

아주 찰나의 희망이 머릿속을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문자화되지 않은 희망을 확대 해석하지 않으려 들뜬 마음을 눌러본다. 기대하면 실망이 큰 법이니까.


약국에 들어가니 이미 몇 사람이 줄을 서 있었고, 금발의 백인 아주머니는 손님들을 세워두고 자기 할 일이 바빠 보인다.

잠깐 기다리다 약사 아주머니의 할 일이 곧 끝날 거 같지 않아 반대편의 스타벅스로 간다.

가장 시원할 것 같은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그 와중에 건강을 생각해서 딸기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는데 특별히 건강할 것 같지는 않다.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갈증을 진정시키니 식량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사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시리얼을 집어 들고 우유까지 고르고 나니 다시 약국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백신을 맞았을까 못 맞았을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우유에 시리얼을 먹으며 오늘의 일기를 쓰자니 세상 평화로운 토요일 낮이 따로 없다. 왼쪽 팔이 뻐근한 덕분에 당당하게 요가를 쉴 수 있으니 그 또한 마음의 짐을 덜게 되었다.

요가 선생님은 주소를 잘못 알려줘서 미안하다며 월요일 수업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심카드로 미국 번호가 생겼으니 이제 밖에서도 마음 놓고 데이터를 쓸 수 있겠다.


오늘내일은 책도 읽고 명상도 하며 평화로운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불현듯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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