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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민 Jun 06. 2022

가까운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았을 때

  나는 오늘 친정 아빠와 대화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 감동스러워서? 아니. 너무 한스러워서. 사실 그건 너무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그간 자라온 내 성장과정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나의 관점에서 우리 부모님은 가까이 하고 싶지만 가까울 수 없는 분들이다.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 다르고 그 사이를 좁히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느껴져서, 가까워졌다 느낄 때마다 곧잘 상처받고 다시 멀어지는 그런 관계다. 

  오늘은 둘째 아이의 피부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감정이 터져버렸다. 아빠는 피부 상태를 정확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으니 빨리 피부과에 가보라고 하셨다. 내가 보기엔 피부가 좀 가라앉은듯해 촌각을 다투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 확인은 해야 하니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를 병원에 언제 데려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여러가지 변수 상황이 떠올라서 생각이 많아졌다.

  아침에 아이와 병원에 갔다가 어린이집을 등원시키려고 하니, 시간이 늦어 도보등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어린이집까지는 성인 기준 약 15분의 거리지만, 아이를 동반하면 15분이 1시간이 되는 마법이 펼쳐진다. 궁금한 것도 많고 하고싶은 것도 많은 3세 아이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돌도 모두 만져봐야 하고 강아지도 따라가봐야 한다. 하고 싶은건 죽어도 해야 한다.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거나 어떤 이유로 기분이 상하면 바닥에 드러눕는 일도 다반사다. 더욱이나 평소에 걷지 않았던 길이니 얼마나 신이 날까. 또 매일 쌍둥이 형제와 함께 지내다 모처럼 엄마와 단 둘이 있는 날이니 또 얼마나 들뜰까. 그런데 병원은 9시 30분에 열고 대기가 있을 수도 있어서 진료시간이 얼마나 길어질 지 모른다. 그리고 어린이집은 가급적이면 10시 30분까지 등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러분은 상황과 답안이 머리에 그려지는지?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엄두가 안났다. 물론 (힘들겠지만) 힘을 써서 어떻게든 유모차에 아이를 붙들어 넣고 그대로 직진해서 어린이집으로 보내면 시간 안에 등원은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아이는 울면서 들어갈 것이다. 나는 아이의 하루의 시작을 울면서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깎여나갈 나의 체력과 멘탈도 지키고 싶었다.

  나는 아이를 최대한 어르고 변수를 통제하여 병원을 가는 목적은 달성하면서 무난하고 기분좋게 등원을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을까를 계속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 날이 남편의 휴무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료 보는 날을 하루 더 미루면 무리 없이 우리 차로 등원을 시킬 수 있었다. 가능한 시간도 맞추고 체력도 아끼며 아이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등원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빠는 내 고민이 이해가 되지 않으시는 듯했다.

  "그냥 데려 가! 애도 하난데 뭐가 걱정이야? 엄마가 그거 하나 못하면 어떡해? 그거 하는게 네 역할 아니야?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봐."

  그 얘기를 들으며 가슴이 턱 막혔다. 또 다시 벽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기엔 아빠는 아이의 병을 확인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엄마라는 사람이 병원 데려갈 생각보다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을 걱정하고 있으니 그게 석연찮으셨던 듯 했다. 병원 데려가는 걸 미루려는 이유가 '본인이 힘들어서'인 것 같으니 더더욱. 그 말에서 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엄마처럼 여겨져서 참 속상했다.

  아빠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참 다르구나 싶었다. 아빠는 병을 확인하는 게 가장 우선이고,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화를 내지 않는게, 그래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작 병원 하나 데려가는 데에 많은 변수를 고려하는 건 '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미 비슷한 상황을 여럿 겪어보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대부분 조급한 마음이 들며 아이를 채근하거나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 상황을 최대한 막고 싶었다. 나는 잠시만 아이를 보고 빠지는 사람이 아니고, 그 날만 아이를 보는 일회성 시터가 아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오전 시간에 체력을 과하게 빼고 불편한 감정으로 시작하면 아이들이 하원한 이후에도 몸과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제일 나은 방향으로 행동하고 싶었다. 나는 그런 고민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듯 했다. 아빠의 마음에 담긴 내가 참 나쁜 엄마 같아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그리고 참 야속했다. 나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좋을텐데. 왜 이유도 묻지 않고 본인만의 생각으로 속단하시는 걸까. 아마 결론은 또 '요즘 애들은 참 이기적이야'로 끝나겠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결국 이기적인 요즘 애가 되는구나. 여기서 또 아빠와의 벽이 느껴졌다.

  그 다음은 자기 검열의 시간이다.

  '내가 잘못했나? 내가 정말 이기적인가? 내가 정말 앞뒤 안가리고 그냥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데, 내 몸 힘들게 무서워서 이리저리 계산하는 게 정말 잘못된걸까?'

  그리고 깨달았다. 

  '나... 이렇게 15년을 살아왔지.'

  우리 부모님과 나는 사춘기 때부터 참 많이 부딪혔는데 그때마다 이런 순서를 거쳐왔던 것 같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나를 오해하는 게 너무 서글프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게 답답해서 눈물을 흘렸다. 내 눈물을 이해 못하시는 부모님은 또 별 것 아닌데 운다고 나무라시곤 했다. 그리고 우리 대화의 대부분의 결론은 '내가 이기적이고 예민하게 생각해서'였다. 처음엔 반발하지만 계속해서 그런 마찰이 생기면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역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걸까 하고. 그러다 보면 내가 눈물이 나는 것도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거고,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 받고 과하게 힘들어 하는 것도 내가 예민해서 그런거라는 결론이 나곤 한다. 그렇게 감정을 15년간 틀어막고 살았다.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그동안의 내가 너무 안쓰럽고 서글퍼졌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나 스스로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 안쓰러움이 터져나왔다.

  사실 부모님과 나는 다른 시대를 살아왔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부딪히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내가 깎여나갔던 시간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좀 더 부모님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친구들을 보면 참 부러웠고 또 괴로웠다. 자라면서 나 스스로가 나를 많이 채울 수 있게 된 이후에는 그동안 나를 깎아나갔던 내가 또 안타까웠다. 그러지 말걸.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람이 다른 건 어쩔 수가 없다. 많이 애써봤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게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하는 말이 (의도대로 혹은 의도와 관계 없이) 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순간이 오면 내 생각과 행동을 여러번 곱씹어 보다가 나를 부정하곤 했는데 여러분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억누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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