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풍류도인]
1. 정적을 걔는 발걸음
아주 어두운 밤이었다. 경복궁의 깊은 어둠 속 비밀 통로에서 숨 가쁘게 빠져나온 최계천의 품에는 비단 보자기에 싸인 갓난아이가 들려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일본 무가의 자존심이자 정예 무사인 타치바나 마사무네와 그의 부하 조직인 적영대였다.
"수고하셨소. 태합 전하께서 그대에게 약속한 영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요."
아이를 넘겨받은 마사무네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계획대로 마포나루에 숨겨둔 쾌속선에 올라 손돌목의 거친 물살을 가로지른 뒤, 서해의 안택선에 닿는다면 추격은 불가능할 터였다. 사전에 치밀하게 뿌려둔 뇌물 덕에 조선의 삼엄한 경비망은 이미 구멍 뚫린 그물처럼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마포나루로 향하는 길목, 짙게 깔린 강안개 사이로 적영대의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마치 어둠의 일부가 된 듯 발소리조차 내지 않았으며, 품에 안은 공주의 숨소리마저 도포 자락 아래로 짓눌러 지워버렸다. 마사무네는 자신의 발밑에서 뭉개지는 젖은 흙의 감촉조차 경계하며, 이미 매수해둔 조선의 파수꾼들이 무사히 길을 터주었음을 확신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위, 앙상한 나뭇가지와 빽빽한 풀숲 사이에는 또 다른 그림자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로 윤충의 대신선원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나뭇잎 하나 흔들지 않는 고요한 움직임으로 적영대의 뒤를 밟았다. 살기를 지우는 법을 익힌 그들의 눈동자는 안갯속에서도 번뜩이는 짐승의 그것처럼 적들의 목덜미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사무네와 그의 적영대가 마포나루의 키 높은 갈대숲에 발을 들인 순간, 비릿한 강바람을 타고 서늘한 죽음의 기운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적이다!"
마사무네의 외침과 동시에 고요하던 갈대숲이 요동치며 인간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대신선원의 수장 윤충과 그의 정예 무사들이었다.
"아이를 내놓아라."
윤충의 묵직한 일갈이 갈대숲을 뒤흔들었다. 마사무네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눈앞의 사내는 일개 칼잡이가 아니라, 산천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내는 괴물이라는 것을. 마사무네는 입술을 깨물며 전승의 일본도를 빼 들었다.
"조선의 공주는 일본의 새로운 태양 아래서 자랄 것이다! 베어라!"
마사무네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적영대의 일급 살수들이 번개처럼 짓쳐 들어왔다. 그들은 그림자 속에 숨어 목숨을 도려내는 데 특화된 자들이었다. 그러나 대신선원의 무사들은 달랐다. 그들의 검술은 단순히 죽이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몸에 새긴 수행의 결정체였다.
챙-! 채채챙!
2. 검날이 부딪치는 갈대숲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적영대의 무사들이 화려한 연속 공격으로 몰아붙였으나, 대신선원의 무사들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그 기세를 받아내고 물처럼 유연하게 흘려보냈다. 적영대의 무사가 단검을 투척하며 사각을 파고들자, 선원의 무사는 검집으로 그 궤적을 튕겨냄과 동시에 단 한 번의 정권으로 상대의 흉부를 함몰시켰다.
고도로 훈련된 살수들이었으나, 윤충 아래서 십수 년을 벼린 선원의 검술 앞에서는 격의 차이가 명확했다. 살수들의 검이 오직 죽임에 매몰되어 있다면, 선원 무사들의 검은 상대를 완벽히 억누르는 제압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강은 갈대숲의 어둠을 가르고 살수들의 급소를 정확히 짚어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는 부하들을 보며 마사무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혼란의 중심을 가르며 한 청년이 마사무네의 앞을 가로막았다. 윤충의 장남이자 대신선원의 후계자, 윤수였다.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적놈아, 검을 뽑아라."
윤수의 서슬 퍼런 경고에 마사무네는 강보를 한 팔로 고쳐 쥐며 일문자 전승의 일본도를 겨누었다. 두 청년 무사의 기세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맞물렸다. 윤수의 검이 은빛 곡선을 그리며 바람을 가르면, 마사무네의 칼날은 직선의 궤적으로 날카롭게 응수했다.
하지만 싸움이 지속될수록 승부의 저울추는 기울었다. 마사무네의 왼팔이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양손으로 쥐어야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는 법. 윤수가 매섭게 몰아칠 때마다 마사무네는 한 손으로 그 파괴적인 기세를 감당해야 했다. 공격을 피하려 해도 품 안의 아이가 다칠까 본능적으로 몸을 사렸고, 검을 크게 휘두르려 하면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까 두려워 칼끝은 자꾸만 위축되었다.
윤수는 적장의 검로가 흐트러지는 이유를 금세 간파했다. 마사무네는 자신의 목숨보다 품 안의 작은 생명을 지키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비록 적이었으나, 그 지독한 충성심과 생명을 향한 집념은 무사로서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켰다.
"아이를 내려놓고 제대로 상대해라! 그것이 무사의 예우다!"
"그럴 수 없다. 이 아이는 나의 목숨이며, 나의 주군이다!"
마사무네의 외침과 함께 최후의 합이 부딪혔다. 균형을 잃은 마사무네의 발이 진흙에 미끄러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윤수의 칼날이 번개처럼 그의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마사무네는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무사로서의 패배는 곧 죽음이었기에, 그는 강보를 끌어안은 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목을 베는 날카로운 고통 대신, 묵직하고 둔탁한 충격이 목덜미를 강타했다. 윤수는 찰나의 순간 검날을 뒤집어 칼등으로 그를 내리친 것이었다.
"……!"
마사무네는 의아한 눈으로 윤수를 올려다보았다.
"왜…… 나를 베지 않는 것이냐?"
마사무네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의식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윤수는 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공주를 넘겨받았다.
3. 차마 베지 못한 적장의 목
적장의 목을 벨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은 무사로서 용납될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나 윤수는 끝내 그의 목숨을 끊어 놓지 못하였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극한의 사투 속에서도, 핏덩이 같은 공주를 제 몸으로 감싸 안으며 버텨낸 저 젊은 무사에게서 차가운 살기 대신 무구한 무인의 기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망설이게 한 것은, 찰나에 마주친 그의 눈빛에서 읽어낸 이유 모를 연민이었다. 그것은 생면부지의 적에게서 느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에, 윤수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이한 심연의 울림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적영대의 무사들은 전멸했다. 붉게 물든 한강 변 갈대숲에는 비린 강바람과 서글픈 적막만이 감돌았다. 윤수는 품 안에서 쌕쌕거리며 잠든 비단 보자기 뭉치를 아버지 윤충에게 내밀었다.
"아버님, 공주마마입니다."
윤충은 무표정한 얼굴로 보자기 틈을 젖혔다. 살벌한 검기와 비명이 오가는 사투 속에서도 아이는 놀랍게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편안하게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 무구한 모습에 철혈의 무사 윤충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이의 어깨에 새겨진 선명한 태극문양, "그분이 틀림없다". 윤충은 과거 선조가 전했던 나직한 음성을 떠올렸다.
"아이의 어깨에 태극의 문양을 새길 것이니, 이는 훗날 과인이 공주를 알아볼 유일한 증좌가 될 것이오."
선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건이'라 하여 주시오. 이는 하늘을 이롭게 하는 아이라는 뜻이오."
윤충은 잠든 공주를 내려다보며 맹세하듯 읊조렸다.
"마마, 이제 이 윤충이 목숨을 다해 지키겠나이다."
윤충의 서늘한 수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정예 무사들이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대형을 갖추었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비슬산 자락, 운명의 요새라 불리는 대신선원을 향해 소리 없이 몸을 날렸다. 마포나루에서 치렀던 참혹한 혈투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운을 넘어, 이 우주의 존망을 건 거대한 서사시가 비로소 첫 장을 넘겼음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