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속이려는 자 위에 또 속이려는 자

[소설 풍류도인]

by 윤영호

1. 조인식의 천거

한양 도성의 밤은 깊었으나, 편전의 촛불은 꺼질 줄 몰랐다. 선조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곁에는 이조판서 조인식이 묵묵히 예를 갖추고 서 있었다.


"조 판서, 곧 태어날 아이가 공주라 하니 마음이 더없이 무겁소. 그 아이가 스무 살 성년이 되기까지 궐 안에 머물면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미친다는 천기를 내 어찌 허투루 듣겠소. 조정은 붕당으로 갈라져 사나운 발톱을 세우고, 바다 건너 왜적의 기세 또한 심상치 않으니... 내 아이의 앞날과 이 나라의 국운에 드리운 이 불길한 그림자를 내 어찌 모른 척하겠단 말이오."


선조의 한탄에 조인식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 성상이 염려하시는 바를 소신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하늘이 보낸 귀한 핏줄을 지키는 것은 곧 이 나라 조선의 뿌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하여, 소신 감히 전하께 제언코자 합니다. 공주 아기씨를 산천의 정기가 서린 대신선원에 맡기시어 보살피게 하소서."


선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궁궐의 금군보다 더 믿을 만한 자가 그곳에 있단 말이오?"


조인식은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올리며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있사옵니다. 소신이 목숨을 걸고 보증하는 무인, 윤충입니다. 그는 칼날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이 이미 한 자루의 곧은 검과 같은 자입니다. 명예를 탐하지 않고 오직 충절만을 호흡으로 삼으니, 그가 이끄는 대신선원이야말로 아기씨를 위한 가장 단단한 성벽이 될 것입니다."


선조는 조인식이 올린 서찰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서찰에는 윤충의 내력과 그가 익힌 무예의 깊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조 판서가 이토록 한 사내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처음 보는구려. 윤충이라... 이름 속에 이미 충이 새겨져 있군."


"전하, 호위 무사란 주군의 그림자가 되어 기꺼이 어둠 속에 머물 줄 아는 자라야 합니다. 윤충은 공주 아기씨의 운명을 제 목숨보다 귀히 여길 유일한 사내입니다. 그를 믿어주신다면, 장차 조선에 닥칠 어떤 풍파 속에서도 공주의 안녕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조인식의 간절한 청에 선조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인식은 편전을 나오며 밤하늘의 북극성을 보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 선택이 어린 공주에게는 가혹한 유랑의 시작이 될지 모르나, 조선에게는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지키는 유일한 길임을.


2. 용상의 의심

근정전 안은 상대의 낮은 숨소리마저 또렷이 들릴 만큼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 고요함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공포와 긴장이 서서히 번져가고 있었다.

선조는 용상에 기대어 앉아, 그 앞에 엎드린 이조참판 조인식을 굽어보았다. 조인식은 영문도 모른 채 어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선조의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조 참판, 그대가 천거한 대신선원의 수장 윤충이라는 자가 오늘 한양에 들었다지?"


"예, 전하. 소신이 국운을 지킬 인재라 믿어 불러올렸나이다."


선조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마치 조인식의 목을 겨눈 칼날의 초침 같았다.


"과인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특히 검을 쥔 자는 더더욱 믿지 않지. 만약 그자가 과인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를 천거한 그대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시각, 병조판서 김익환은 선조의 밀명을 받들어 윤충을 무너뜨리기 위한 거대한 덫을 펼치고 있었다.


첫 번째 시험: 힘의 유혹과 무사의 긍지


한양 외곽의 화려한 별궁. 김익환은 윤충을 초청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김익환의 수하 중 일당백으로 소문난 무장 '흑칠'이 나서 윤충의 호위무사에게 대결을 청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검투. 대신선원의 무사는 단 세 합 만에 흑칠의 칼을 날려버리고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좌중은 정적에 휩싸였고, 김익환은 감탄 섞인 미소를 지으며 윤충에게 다가갔다.


"허어, 참으로 대단한 실력이구려! 윤 관주, 이런 인재들을 고작 산구석에 썩히다니 아깝지 않소? 지금 조정은 당파 싸움으로 썩었소. 나와 손을 잡고 이 나라의 판을 새로 짜봅시다. 윤 관주의 무력과 내 권세라면 못 할 일이 무엇이겠소?"


주위의 장수들도 은근히 부추기며 반란의 기운을 흘렸다. 그러나 윤충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사의 검은 도를 지키기 위함이지, 비겁한 찬탈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니오. 대감의 제안은 내 아버지가 가르치신 ‘충’에 대한 모욕이오."


윤충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 소식은 즉시 전령을 통해 선조에게 보고되었다. 선조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아직 조인식의 안색은 창백했다.


두 번째 시험: 의금부의 지하와 검의 철학


조인식의 전갈을 노심초사 기다리던 윤충은 돌연 들이닥친 관군들에 의해 '역모 공모죄'로 포박되어 의금부 지하 옥방에 처박혔다. 쇠사슬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 속에서 김익환이 다시 나타났다.


"내일이면 자네와 대신선원 식구들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네. 억울하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선원에 비밀 연락을 넣어 자네의 사병들을 움직이게. 그들이 한양 북문을 습격해 자네를 탈취한다면 내 군사들이 합세할 것이네."


윤충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김익환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옥방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무사들의 검은 이 나라의 힘없는 백성을 위해서만 검집에서 뽑혀야 할 뿐, 나 개인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뽑혀서는 안 되오. 차라리 내가 죽어 선원의 결백을 증명할지언정, 내 사사로운 안위를 위해 제자들을 사지로 몰지 않겠소."


이 보고를 받은 선조는 찻잔을 꽉 쥐었다. 옆에 앉은 조인식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선조는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구나."


세 번째 시험: 조인식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겁박


깊은 밤, 윤충은 궁궐 뒤편의 밀실로 압송되었다. 김익환은 윤충의 결박을 슬쩍 풀어주며 칼 한 자루를 던졌다. 그리고 최후의 비수를 꽂았다.


"윤 관주, 자네만 죽는 게 아니네. 자네를 천거한 이조참판 조인식도 지금 근정전에서 효수될 위기에 처했네. 자네가 지금 이 칼을 들고 도망치지 않으면 조 참판의 안위 또한 보장할 수 없네. 어서 도망가게! 그것만이 자네와 조 참판이 살길일세!"


윤충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자신을 믿어준 은인, 조인식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말에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듯했다. 그러나 윤충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지 않았다.


"내가 지금 도망치면 조 참판 어른은 역적을 추천한 죄인이 되고, 대신선원은 반역자의 소굴이 될 것이오. 내 목숨 하나를 버려 그분들의 결백을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이 자리에서 죽겠소. 조 참판 어른께서도 내가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을 원하실 것이오."


윤충은 무릎을 꿇고 목을 길게 늘어뜨렸다. 김익환이 광기에 찬 모습으로 칼을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죽어라!"


3. 신뢰의 탄생

칼날이 윤충의 목에 닿기 직전, 밀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선조와 조인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익환은 즉시 칼을 거두고 바닥에 엎드렸다.

실시간 보고를 받으며 가슴을 졸였던 선조는 천천히 윤충에게 다가갔다. 조인식은 비로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윤충을 바라보았다.


"윤 관주, 과인의 시험이 가혹했음을 용서하시오. 그대의 충심이 정녕 죽음보다 깊고, 조 참판과의 신의가 바위보다 단단함을 이제야 확인했소."


선조는 직접 윤충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조인식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조 참판, 그대가 사람을 제대로 보았구려. 과인의 의심이 거두어졌으니, 이제 이 나라의 가장 귀한 보물을 그대들에게 맡길 것이오"


선조는 윤충에게 앞으로 태어날 공주를 맞기기 위해 비공식적인 직함인 ‘공주 전담 호위무사’의 밀명과 함께, 왕실의 비밀 징표를 하사했다. 또한 대신선원을 '국가 비밀 무력 집단'으로 공인하고 비밀리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밤이 깊어가는 궁궐, 조인식과 윤충은 서로의 눈을 맞추며 말 없는 안도와 신뢰를 나누었다. 핏줄보다 진한 사명감으로 묶인 두 사내의 어깨너머로, 조선의 정기를 품은 공주가 태어날 달빛이 밝게 비치고 있었다.


4. 독이 든 성배

관상감 판사 최계천이 일본의 검은 손길에 포섭된 것은 결코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년에 걸쳐 독이 든 성배를 조금씩 들이키게 한, 치밀하고도 잔인한 공작의 결과였다.

시작은 사소한 연회였다. 동래 왜관을 드나드는 거상으로 위장한 일본의 간자들은 최계천의 탐욕과 열등감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최계천이 명예보다 실리를, 학문보다 장생에 집착한다는 점을 이용했다. 처음에는 진귀한 서역의 보석이, 그다음에는 복용하면 십 년은 젊어진다는 기이한 비약들이 최계천의 비밀 금고를 채워 나갔다.

그 대가는 단 하나, 곧 태어날 조선의 공주를 궁 밖으로 내모는 거짓 천기를 올리는 것이었다.

왜관의 밀실,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 너머로 일본 간자 '무라카미'가 최계천의 검버섯 핀 손등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판사 어른, 저희가 바라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입술 한 번 달싹여, 갓 태어날 공주를 궁 밖으로 잠시 '피신'시켜야 한다는 천문을 올리는 일뿐이지요. 그 가련한 핏덩이가 궁 안에 머물면 전하의 기운을 갉아먹고 조선의 대지에 불길한 혈우가 내릴 것이라... 그렇게 전하께 고하십시오."


최계천이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를 궁 밖으로 내모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란 말이오? 만약 비난의 화살이 나에게 쏟아진다면..."


"비난이라니요? 오히려 나라를 구한 충신으로 칭송받으실 겁니다. 보십시오."


무라카미는 품 안에서 유백색의 빛이 감도는 작은 옥병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이것은 성계의 기운을 담은 영약입니다. 이것을 복용하면 판사 어른의 굽은 등은 펴지고, 흐릿한 안광은 청년의 그것처럼 맑아질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백 년의 세월을 더 누릴 수 있는데, 고작 갓난아이 하나 내보내는 일이 무에 그리 어렵겠습니까?

게다가 공주가 우리 손에 들어오는 날, 이 땅의 모든 산천이 판사 어른의 정원이 될 것이며, 흐르는 강물조차 황금으로 변해 어른의 발치에 고일 것입니다. 인간의 셈으로는 결코 측량할 수 없는 무궁한 부귀영화가 대대손손 끊이지 않는 영광으로 약속될 것인데, 무엇을 더 망설이십니까?"


무라카미는 최계천의 귀에 바짝 다가가 뱀처럼 서늘하게 속삭였다.


"우리는 아이만 데려갈 뿐입니다. 아이가 사라진 뒤에는 판사 어른이 원하는 대로 조선의 천문을 다시 쓰십시오. 황금은 강물처럼 흐를 것이고, 판사 어른은 영원한 젊음 속에서 그 부귀를 누리시면 됩니다. 자, 이 성배를 비우고 신의 길로 들어서시겠습니까?"


탐욕에 눈이 먼 최계천의 손이 홀린 듯 옥병과 황금 더미 위로 뻗어 나갔다. 이미 그의 뒤편으로는 차가운 일본의 칼날들이 소리 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5 그림자 속의 정보망

하지만 그들의 치밀한 공작 위에는 더 높은 곳에서 판을 읽는 눈이 있었다.

과거 현풍 현감으로서 민초들의 삶을 살피던 조인식은, 이제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조정의 핵심 요직인 이조참판에 올라 있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조정의 움직임보다 바닥 민심과 은밀한 정보의 흐름을 더 중시했다. 조인식은 전국 각지에 '귀'와 '눈'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정보원들을 심어두었다.

어느 날 밤, 조인식의 집무실로 그림자 하나가 스며들었다. 동래 왜관 근처에서 봇짐장수로 위장해 활동하던 그의 정보원이었다.


"참판 어른, 최계천이 지난달에만 벌써 세 번이나 왜관의 밀실을 찾았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간 상자에서는 조선에서 볼 수 없는 기이한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조인식은 찻잔을 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관상감 판사가 왜관의 약재에 탐을 낸다라……. 천기를 살피는 자가 제 명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으니, 필시 그 입에서 망령된 소리가 나오겠구나."


그의 눈빛이 등잔불 아래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조인식은 붓을 들어 서책 한 귀퉁이에 짧은 글귀를 적어 내렸다. 그것은 최계천이 일본 측으로부터 받은 비약의 목록과 일치하는, 성계의 기운이 섞인 금지된 약재들의 이름이었다.


"놈들이 던진 미끼가 생각보다 치명적이군. 육신을 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끝없는 갈증을 부르는 악마의 정수다. 최계천은 이미 제 영혼을 왜놈들에게 저당 잡힌 셈이야."


조인식은 창밖의 짙은 어둠을 응시했다. 그는 최계천을 당장 체포하여 국문장에 세우지 않았다. 섣부른 단죄는 궐 깊숙이 숨어든 더 큰 거미들을 음지로 숨어들게 할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인식은 역으로 그들의 계략을 미끼 삼아, 거미줄 자체를 통째로 걷어낼 더 거대한 함정을 파기로 했다. 그는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정보원에게 나직하지만 서늘한 명령을 내렸다.


"최계천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하여라, 그가 전하께 '흉조'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흉조를 뒤엎을 '천명'을 준비해야 한다."


조인식은 이미 선조에게 은밀히 밀서를 전하여 궐내에 드리운 불온한 공기를 경고한 상태였다. 그는 왕실 주변의 경비를 소리 없이 강화하는 한편, 가장 신뢰하는 무사 윤충에게도 긴박한 전갈을 보냈다.


"윤충, 이제 곧 폭풍이 몰아칠 것이네. 궐 안의 눈과 귀가 모두 멀어버릴 때, 자네의 검만이 유일한 등불이 되어야 하네. 공주께서 첫 숨을 내뱉는 날, 그날이 바로 이 나라의 국운이 결정될 사투의 날이 될 것이야."


조인식의 집무실 한편에 놓인 모래시계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전선은 이미 형성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최계천이 독이 든 성배를 들고 선조의 침전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뿐이었다.


6. 대궐의 독대와 함정의 함정

최계천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천기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밤중에 대궐 문을 두드렸다. 마침내 선조와 독대하게 된 최계천은 창백한 안색을 연기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전하, 소신이 며칠 밤을 새워 천문을 살핀 결과, 실로 두려운 기운을 보았나이다. 곧 탄생할 아이가 조선의 정기를 품고 있으나, 그 기운이 너무도 강해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궁중에 머문다면 나라에 전무후무한 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부디 아이를 궁 밖으로 피신시켜 신분을 숨기고 키우셔야 하옵니다."


최계천은 자신의 연기가 완벽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선조의 눈빛은 차가웠다. 선조는 이미 조인식으로부터 최계천의 배후와 그가 받은 뇌물 목록까지 보고받은 상태였다.

선조는 서늘한 침묵으로 최계천을 압도하다가, 이내 얼굴에 거짓된 고뇌와 인자함을 드리우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최계천을 더 깊은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치밀하게 계산된 양보였다.


"판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나라를 위하는 그대의 충정이 이토록 깊으니, 내 어찌 그 간언을 외면하겠는가. 좋소. 하늘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경을 전적으로 믿고, 장차 태어날 공주의 안위와 거처를 오직 그대에게 일임하겠소."


선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압도하는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다만, 이 일은 궐 안의 그 누구도, 심지어 중전조차 알아서는 안 될 비사여야 하오. 공주가 태어나는 즉시, 그대 혼자만의 힘으로 아이를 궁 밖 은밀한 곳으로 빼내시오. 그 아이가 장차 조선의 국운을 짊어질 존재라면, 세속의 눈을 피해 어둠 속에서 자라야 할 터이니."


최계천의 눈동자가 야욕으로 번뜩이는 것을 보며 선조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그리고 아이의 어깨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붉고 푸른 태극의 문신을 새겨 넣으시오. 이는 세월이 흘러 풍파가 닥치더라도 내가 내 핏줄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낙인이자 증표가 될 것이오. 알겠소? 오직 그대만이 이 아이의 생사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최계천은 전율하며 목을 놓아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늘이 내리신 이 막중한 소임을 오직 저 한 몸에 믿고 맡겨 주시니, 신 죽어서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


최계천은 희열에 찬 미소를 감추려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자신이 왕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다는 오만함에 취한 그는, 선조가 이미 조인식과 함께 거대한 함정을 파놓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최계천이 승전보를 든 장수처럼 위풍당당하게 물러나자, 병풍 뒤에서 조인식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보았소, 조 판서? 저자의 입에서 왜놈들이 짜놓은 흉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나오는구려. 내 저자에게 공주를 맡기겠다 했으니, 아마 지금쯤 왜국의 간자에게 개처럼 달려가 꼬리를 흔들고 있을 것이오."

조인식은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 이제 시위는 당겨졌나이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저들의 칼날을 온몸으로 막아낼 무사 윤충의 충절에 달려 있사옵니다."


조인식의 말이 끝나자, 선조는 윤충의 믿음직한 모습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호위 무사 윤충... 그대가 잘해주길 바랄 뿐이오..."


비바람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함처럼, 대궐의 밤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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