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붉은 원숭이와 강림한 가짜 신

[소설 풍류도인]

by 윤영호

1. 가네가사키의 금속 구체와 '무령'

오다 노부나가가 횡사한 혼노지의 불길이 채 식기도 전, 일본의 새로운 패자로 우뚝 선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람들은 그를 '백 년에 한 번 나올 천재' 혹은 '전쟁의 귀신'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화려한 승전보의 이면에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계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때는 1570년, 가네가사키 퇴각 전. 아자이와 아사쿠라 연합군의 추격에 오다 군은 전멸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하급 무사였던 히데요시는 죽음을 각오하고 후방을 지키는 '신가리'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 두려웠다. 숲 속으로 도망치던 히데요시는 이름 모를 동굴 깊숙이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그는 보았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거대한 금속 구체와, 그 곁에 서 있는 한 사내를. 사내는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 몸을 감싸고 있는 기운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외계의 약탈자들이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는 상위 권력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내세운 '인간 전령', 바로 무령이었다.


무령은 본래 전장에서 죽어가던 무명 무사였으나, 외계 지성체에 의해 영혼이 소멸되고 그 빈 육신을 고도의 인공 신경망이 장악한 존재였다. 그는 외계 기술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히데요시의 귓가에 '신의 음성'을 전하는 예언자이자, 우주 전술 분석기의 인간 인터페이스였다.


"네 안의 끝없는 갈증을 보았다. 죽음이 두려운가, 아니면 이 초라한 생이 억울한가?"


무령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기계적인 진동음에 히데요시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지배하고 싶나이다. 나를 멸시하던 저 귀족들과 천하를 내 발아래 무릎 꿇리고 싶나이다!"


2. 기적의 연속

그날 이후, 히데요시의 행보는 말 그대로 '기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령이 뇌파로 전송받은 외계의 데이터를 히데요시에게 속삭여준 결과였다.


시즈가타케 전투(1583): 숙적 시바타 가츠이와의 명운을 건 결전에서, 히데요시의 군대는 물리적 한계를 비웃는 경이로운 속도로 진격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를 '미노 대행군'이라 칭하며 기적적인 기동력이라 기록했으나, 그 이면에는 가려진 진실이 있었다.

실상은 무령이 공간의 흐름을 뒤틀어 인과를 굴절시킨 결과였다. 무령의 힘으로 시공간을 가로지른 히데요시의 군사들은 마치 빛의 갈래처럼 전장을 휩쓸며 적의 배후를 찔렀다. 이 초월적인 승리를 발판 삼아,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쌓아 올린 패권의 정당한 계승자이자 천하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오사카 성의 축조: 단 몇 년 만에 세상을 굽어보는 황금의 거성, 오사카 성이 대지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무령이 전수한, 이 지상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건축 역학의 결정체였다.

무령은 히데요시의 귓가에 속삭여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합금 기술을 전수했다. 용광로에서 끓어오른 금속은 강철보다 단단하고 다이아몬드보다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성벽의 골조가 되었고, 거대한 화강암 지반은 무령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뒤틀리며 단단히 맞물렸다.


해자의 물길은 기하학적인 수로를 따라 흐르며 성 전체에 기묘한 진동을 일으켰고, 태양 빛을 머금은 황금 기와는 수십 리 밖에서도 눈이 멀 정도의 광휘를 내뿜었다. 히데요시는 이 기적과도 같은 광경을 '천상의 조화'라 선전하며 자신을 신격화했다. 백성들은 경외감을 넘어선 공포에 질려 무릎을 꿇었고, 히데요시는 그들의 떨림을 발판 삼아 무령의 힘이 깃든 절대적인 공포 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히데요시는 무령을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이 지상에 현신한 '천신의 유일한 대리인'이라 받들어 모시며 자신의 영혼마저 그 발치에 바쳤다. 그에게 무령은 천하를 발아래 두게 한 근원이자, 사후의 영생까지 보장해 줄 절대자였다.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오사카성을 찬란한 황금으로 도배한 광기 어린 대역사 또한 무령의 지엄한 명에 따른 것이었다. 범인들의 눈에 그것은 하찮은 권력의 과시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무령이 설계한 거대한 '성계의 안테나'였다.


3. 황금 찻실의 환영

오사카 성의 깊은 곳, 사방이 황금으로 뒤덮인 밀실에 히데요시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공기가 진동하며 푸른빛의 파편들이 허공에 응집되었다. 외계의 전령 무령의 형상이 나타났다.


"원숭이라 불리던 미천한 생명이여. 나의 지식으로 열도를 네 발아래 두었으니, 이제 약속된 재물을 바칠 때가 되었다."


무령의 음성은 히데요시의 고막이 아닌 영혼을 직접 흔들었다. 히데요시는 황금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성계의 주인이시여. 소신, 이미 조선의 바다 건너를 응시하고 있나이다. 당신이 말한 그 '열쇠'가 정말 그곳에 있나이까?"


무령이 허공을 휘젓자, 조선의 전 국토가 3차원 입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지도 위의 한 점, 한양의 궁궐 한복판이 핏빛으로 붉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조선 왕실의 혈통 깊숙이 각인된 순수한 영기가 드디어 나의 성계 에너지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곧 태어날 그 아이는 인간의 피와 살을 빌려 강림하는, 차원의 문을 열 유일하고도 고귀한 매개체다. 명심하라. 성계의 신은 오직 그 아이의 맥동하는 '살아있는 성혈'만을 원한다."


무령의 음성은 히데요시의 뇌를 직접 울리는 기괴한 진동으로 이어졌다.


"기한은 그 아이의 신성한 피가 속세의 탁기에 오염되기 전인 스무 해(20년)이다. 하나, 아이가 첫 숨을 내뱉는 태동의 순간이야말로 차원의 문을 열 가장 거대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찰나를 놓치지 마라. 그것이 네가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될 유일한 길이다."


무령은 히데요시의 뇌리 깊숙한 곳에, 거부할 수 없는 낙인처럼 아이가 태어날 천기의 날짜를 새겨 넣었다. 그 순간, 히데요시는 전신을 관통하는 지독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열도를 피로 물들여 손에 넣은 권력조차 무색게 할, 영원불멸의 삶과 온 천하를 자신의 발아래 영원히 굴복시킬 절대 패권이 오직 그 아이의 생사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것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탐욕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노쇠해가는 육신을 내려다보며, 아이의 맥동하는 성혈이 가져다줄 초월적인 힘을 갈구했다. 이제 그에게 조선과 대륙은 정복해야 할 영토를 넘어, 자신의 신격화를 완성하고 영원한 제국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찬탈해야 할 '신의 제물'이 보관된 창고에 불과했다.


4. 소년 수장, 적영의 탄생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의 보물을 가져오기 위한 '금화탈환(조선의 보물을 가져온다)' 작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최정예 조직 '적영대(붉은 그림자 부대)'를 선발하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검객과 닌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 아닌 처참한 지옥이었다.

지원자 수백 명을 좁고 어두운 지하 동굴에 가두고, 단 오십 명 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던져주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동료의 목을 긋는 칼소리와 비명뿐이었다. 다음 날 문이 열렸을 때, 동료의 시신을 딛고 걸어 나온 자들은 이미 인간의 감정을 잃은 귀귀들이었다.


살아남은 소수에게는 소량의 독을 매일 섭취하게 하며 환각 속에서 서로를 죽이게 하는 가혹한 훈련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천재 무사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으나, 마사무네를 포함한 단 십여 명 만이 독기를 이겨내며 자신의 검을 닦아내었다.


히데요시의 어전에 살아남은 열 명의 무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중 네 명은 전장에서 뼈가 굵은 노련한 낭인들과 이름난 가문의 가신들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시선이 머문 곳은 가장 끝에 자리한, 이제 겨우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의 다치바나 마사무네였다.


"마사무네라 하였느냐. 네 나이 이제 약관일진대, 이 쟁쟁한 자들을 제치고 수장이 되겠다는 것이냐?"


히데요시의 물음에 곁에 서 있던 중견 검객, 고바야시가 비웃듯 끼어들었다.


"주군, 이 애송이는 제 가문의 이름값으로 여기까지 온 것에 불과합니다. 적영대의 수장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제가..."


고바야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마사무네의 몸이 잔상처럼 흔들렸고, 찰나의 순간 검기가 어전을 갈랐다. 고바야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자신의 상투가 잘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마사무네의 검은 이미 칼집에 들어가 있었고,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품에서 자신의 가문패를 꺼냈다.


"나이와 경험이 칼날을 예리하게 만든다면, 어찌 주군의 대업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단 말입니까?"


마사무네는 가문패를 바닥에 던져 내리친 뒤, 망설임 없이 짓밟아 두 토막을 냈다. 가문의 굴레를 스스로 끊어버린 무사의 시선이 히데요시의 안광과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가문의 성씨도, 무사로서의 이름도, 그리고 제가 보낸 20년의 세월도 이 자리에서 모두 버렸나이다. 저는 이제 나이도 이름도 없는, 오직 주군의 명령에만 고동치는 살인 병기일 뿐입니다."


어전에는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히데요시는 고바야시의 상투와 마사무네의 형형한 눈빛을 번갈아 보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좋다! 나이 먹은 사냥개들은 겁이 많아 사냥감을 놓치기 마련이지. 이토록 어린 나이에 제 뿌리까지 잘라낸 독종이라니! 다치바나 마사무네, 네가 적영대의 수장이다. 네 놈의 그 젊은 패기로 조선의 보물을 내 발치에 바쳐라."


파격적인 인사였다. 서열과 경륜을 중시하는 일본 무가 사회에서 20대 초반의 청년이 특수 부대의 수장이 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사무네가 뿜어내는 기운은 이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웠다.


선발된 적영대의 노련한 무사들은 이제 자신들보다 한참 어린, 그러나 가장 잔혹한 이 소년 수장의 뒤를 따라 조선을 향한 죽음의 항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 외계 지성체의 두려움

외계 지성체들은 인류의 역사에 직접 개입했을 때 닥쳐올 '우주 법도'의 준엄한 심판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경계하는 실체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태초부터 한반도의 영맥에 뿌리를 내리고, 성계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의 강토를 보이지 않는 장막으로 수호해 온 ‘고대의 감시자들’이었다.


“함부로 물리적 실체를 드러내지 마라. 조선의 산천을 굽어보는 저들의 눈은 성계의 병기보다 날카롭다. 우리가 직접 손을 뻗는 순간, 저 수호자들과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무령의 경고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만약 외계의 함대가 조선의 하늘에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다면, 잠들어 있던 조선의 고대 성계 세력 또한 침묵을 깨고 일어날 것이 자명했다. 그것은 곧 은하 전역을 초토화할 거대한 성전의 서막이 될 터였다.


결국 그들은 모든 초자연적인 기적을 히데요시의 ‘지략’으로 포장하고, 외계의 계시를 무령의 ‘예언’으로 위장하는 교묘한 수를 썼다.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의 전쟁으로 은폐한다면, 조선의 수호자들 역시 우주의 인과율에 묶여 함부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거대한 두 문명이 벌이는 ‘차원 간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장기판의 말이 되어 있었다. 무령의 권능으로 천하 통일이라는 불가능한 위업을 선물 받은 대가로, 이제 그는 피할 수 없는 계약의 이행을 명령받았다. 그에게 떨어진 지엄한 과업은 단 하나, 조선 왕실의 영기를 품고 태어날 공주를 찬탈하여 무령의 제단 앞에 바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즉시 조선의 탐욕스러운 관리 최계천을 매수하여 내부의 눈을 가리는 거미줄을 쳤다. 동시에 장차 태어날 공주를 가로채기 위해, 그림자 속에서 칼날을 갈아온 마사무네 와 그의 적영대를 조선으로 급파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침략의 거센 파고가 일기도 전, 조선의 국운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음모의 촉수는 이미 한양 궁궐의 가장 깊숙한 침전까지 소리 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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