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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장 고무신

15화 화상

by 캔디쌤

어릴 적에 살던 집은 큰방과 작은 방 그리고 부엌이 나란히 일자로 붙어있고 방문 앞엔 좁은 툇마루가 있는 전형적인 남방형 한옥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새로 집을 짓기 전까지 우린 그 집에서 모두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다.


작은 방 앞, 뜬금없는 자리에 시커먼 가마솥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가끔 손님방을 데우거나 부가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 평소엔 그저 빈솥으로 자리만 차지했다.


그 솥 때문에 마당에서 부뚜막, 부뚜막에서 마루까지 2단의 높이는 상당했다.


마당에서 놀다가 방으로 들어가려면 어린 동생들은 그 부뚜막을 붙잡고 옆으로 기어올라가거나 언니들이 당겨주어야 했다.


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혹이 나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뇌진탕에 안 걸리고 살아남은 게 기적일 만큼 아이들의 안전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어른 중심 구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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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엔 태어난 지 얼마안 된 넷째 동생이 자고 있었고, 나는 바로 아래 동생과 '떠든다는 이유'로 툇마루로 쫓겨났다.


만 네 살이었던 내가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사실에 엄마는 생전에 늘 '아이고 이상타. 그걸 어째 다 기억하냐?' 라며 놀라워하셨다.


(사실 이 사건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과거의 사건이다.)


삶은 콩을 열심히 퍼 나르는 엄마, 콩을 밟아 메주를 만드는 할머니... 우린 비좁은 툇마루를 종종걸음으로 달리기도 하고 마루에 엎드려 손을 뻗어 피어오르는 김을 서로 많이 잡겠다고 야단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늦가을.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엄마가 콩을 거의 다 퍼냈을 때 동생이 조금 남아있는 콩과 김을 잡으려다가 뜨거운 가마솥, 콩을 거의 건져낸 검은 물에 풍덩 빠졌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둘이 거의 꺼져가는 김을 서로 잡겠다고 실랑이를 했고 엎드린 채 서로 밀당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화들짝 놀란 엄마가 동생을 건져 옷 입은 채로 찬물을 부었지만 우물에서 떠다 놓은 물이 부족해 충분한 쿨링은 불가능했다.


놀라서 팔을 휘적이며 뛰어오는 할머니.


우물에 달려가 얼른 찬물에 담갔더라면 어땠을까.


초겨울이라 옷도 더 두꺼웠고 함부로 벗기면 안 되었기에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화상엔 빛을 보면 안 된다고 해서(근거는 아무도 모름) 검은 외투를 뒤집어씌운 채 동생을 업고 두 시간이나 되는 읍내로 엄마는 미친 듯이 내달렸다.


화상으로 진액이 나고 목이 말라 등 뒤에서 동생이 많이 칭얼 댔는데 엄마는 그때를 떠올리며.. '물이라도 가져갈 것을... '하며 많이 애잔해하셨다.


물이 설령 있다 한들 어디에 담아 간단 말인가. 그 흔한 텀블러나 물통이 있을 리 만무하던 시절...


아무리 엄마 등이라고 해도 시커먼 겨울 옷으로 뒤집어 씌웠으니 얼마나 덥고 무섭고 목말랐을까.


지나가던 행인에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냉수 한 사발 내주는 게 시골 인심이었지만


불행히도 엄마가 달려가던 그 길에 마을이 없었다.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며 몸 푼 지 얼마 안 된, 갓 서른의 젊은 엄마의 속도 새까맣게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읍내에 나가봐야 변변찮은 병원도 없었고 보건소가 고작이었지만 여하튼 엄마와 동생은 그날 고생을 한 바가지 했다.


그 이후 동생은 진물과 살갗이 벗겨져 오랫동안 아파했다고 한다.


울퉁불퉁한 목 뒤쪽과 왼쪽 팔의 흉터모양으로 봤을 때 아마 제대로 된 연고도 바르지 못한 채 자연 치유된 것 같다.


얼굴 안 다친 게 어디냐고 위로하기엔 상처가 너무 방대하고 흉하다.


엄마는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몸이 태생적으로 약해서인지 몰라도 셋째를 유난히 편애했다.


한번 먹어보지 못한 보약도 그 동생은 먹었고 집안 일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인 내가 콩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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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점처럼 점점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뒷모습,

툇마루에서 어렴풋한 죄책감으로 겁먹은 채 바라보던 어린 나,

찰나의 순간으로 남은 사진 속 그 세 사람...


하나같이

아련하고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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