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누명
옆집 완이는 아주머니가 사십 중반에 낳은 4형제 중 막내로 맏형은 이미 장가를 갔고 다른 형들도 터울이 많아 집안에선 외로운 아이였다.
밥숟가락을 떼면 난 늘 동생을 업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콩쥐 신세였지만 겨울은 달랐다.
농한기의 시골은 다들 한가했고 덩달아 나도 한가했다.
가끔 반달샘에 가서 기저귀 빠는 것만 도우면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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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야, 너거 밭에 뭐 짓니?"
어느 날 완이 집 앞 빈 논에 아저씨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 비닐하우스 짓는 거래"
" 그게 뭔데?"
" 나도 몰라"
아니 비닐도 귀하던 시절에 비닐하우스라니!!!
우리 동네에 비닐하우스가 처음 선을 보인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날이.
정말 신기했다.
겨울인데도 안에 들어가면 땀이 났고 하나도 춥지 않았으며 파릇파릇 채소들도 자랐다.
아주머니가 밭을 맬 때 우린 한 쪽구석에서 소꿉놀이에 쓸 풀을 뽑았다.
동네 아이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소꿉놀이를 즐겼는데 겨울엔 재료? 가 없어서 논두렁에 그저 불을 지르거나 연을 날리며 놀았는데 비닐하우스의 등장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완이와 가장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비닐하우스의 혜택을 내가 가장 많이 누렸고 매일 방문했다.
한 살 많은 내가 기싸움에선 한 수 위였고 싸울 때 돌멩이로 이마에 피를 낼 때도 있었지만 우린 대체로 사이가 좋았다.
적어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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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여느 때처럼 완이네 비닐하우스에서 겨울의 따스함을 만끽하며 밭고랑 사이를 오가며 놀고 있는데 문득 완이가 나에게,
" 우리 다른 놀이 할까?"
" 아니. 난 여기가 더 조은데..."
방에 가봤자 책도 없고 티비도 없는데 예닐곱살 아이들이 놀 거라고는 딱 하나.ㅡ 술래잡기나 윷놀이...
그때 다른 아이들이 완이의 의견에 동조를 했고 우린 잠시 방에 가서 윷놀이 한판을 하고 나왔다.
정말 뉘 집 할 것 없이 방은 잠잘 때 빼곤 들어갈 이유가 없는 심심한 곳이었다.
" 혹시 어제 안방에 두었던 천 원 못 봤냐"라고...
" 어제 우린 완이 방에서만 놀았는데요"
" 그래도 네가 자주 놀러 오잖아. 진짜 천 원 본 적 없니?"
" 우린 안방에 안 들어갔어요ㅜㅜㅜ"
완이 엄마는 절대절대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나무라거나 원망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나를 구슬려서 자백을 받아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난 아버지가 창틀에 얹어놓은 십 원짜리, 오십 원짜리를 맘대로 가져가 옥이네 전방에서 '왔다 껌'을 몰래 산 적은 있지만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적은 결코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정말 양심적이었고 따라다니면서 외상을 갚을 정도로 계산이 올바른 사람이었기에 훔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큰일이었다.
완이엄마가 의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속상해할 부모님이었기에 난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그 당혹감과 수치스러움을 견뎠다.
나 이외에 다른 친구들에게도 탐문조사를 했는지, 아니면 그 천 원을 찾았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난 그날 이후로 비닐하우스 방문을 강제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된 의심의 눈초리와 심문을
여린 마음이 감히 견뎌내지 못했다.
대문 틈으로 비닐하우스를 훔쳐보거나 완이 엄마를 최대한 피해 다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을 뿐....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난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았던 1학년들은 야물딱진 스물한 살의 선생님에게 붙잡혀 거의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하고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비닐하우스도 완이 엄마도 잊혀졌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기는 게 유쾌하지 않지만 완이 엄마의 말투는 또렷이 생각난다.
(이해해요... 이해한다구요! 천 원이면 라면이 몇 봉 지야?? 얼마나 아까웠을까... 하지만 전 절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