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각 학년 당 두 학급, 전교생은 700명이 넘을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다.
고무줄놀이 하다못해 오징어 놀이라도 하기 위해선 공간 확보가 최우선!
도시락을 일찌감치 까먹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얽히고설켜서 때론 오빠들한테 자리를 뺏기면서도 교실에 남아있는 것보단 운동장이 훨씬 좋았다.
숙제가 공부의 전부였고 미래 걱정 따윈 전혀 없던 어느 날, 새 교장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점심시간의 소란함은 사라졌다.
학구열이 대단했던 교장선생님은 12 동네 중 1~3등을 가려 비싼 학용품을 주면서 우리의 경쟁을 부추겼고 그에 따라 담임선생님도 부진학생에 대해 날이 깜깜해질 때까지 '나머지 공부'를 시켜야 했다.
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남학생은 몸통을 가로질러 세로로 매고 여학생은 기모노 입은 일본 여인네처럼 허리에 두르고 등교를 하던 시대니, 학용품은 아주 매혹적인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커다란 건전지를 돌로 깨부순 후 그 안의 흑연을 깎아 급할 땐 연필로 쓰고 지우개 대신 침을 발라 지우고 어떨 땐 다 쓴 공책을 다시 지우고 재활용하기도 했으니 두 말해 뭣 하겠는가.
월말고사는 자주 동네 아저씨의 술안주 감으로, 빨래터에서는 아주머니들의 주된 이야깃거리였으며 상을 받은 동네는 마을회관에서 잔치를 열어 아이들을 격려했다.
동네 아이들은 성적이 고만고만했는데 영구네 남매가 유독 공부를 못했다.
영구는 글을 못 읽었으니 시험성적은 보나 마나 빵점이었지 싶다.
세 남매 모두 그 수준이니 죽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 동네가 3등 안에 들 희망은 아예 없었다.
경쟁심이 많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던 우리 4 자매가 평균값을 아무리 끌어올려도 영구 때문에 말짱 도루묵! 억울하고 분했다.
사건이 있던 그날 우리의 귀가 코스 놀이터인 '무덤'에서 놀고 있는 영구를 보고 눈이 뒤집혔다.
여기서 잠시 무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내가 1학년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비석도 없고 주인도 없는 무덤이 들판 한가운데 세 개 있었다.
논 한가운데 그것도 등굣길에 있었으니 안 그래도 심심하던 시골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파릇한 잔디마저 깔려 있어서 무섭다는 생각보단 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서 무덤에 올라가기 전 단체로 묵념하고 실컷 놀고 나선 또다시 묵념을 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귀신의 저주를 두려워하면서도 우린 그 묵념으로 면죄받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것 같다.
신발을 벗고 무덤을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타고 무덤에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로 자기 무덤이 더 좋다고 실랑이를 했다.
행여 도시락에 남은 밥이 있으면 나눠 먹고 특히 무덤 위에서 하는 줄다리기는 가장 재밌었는데 진 팀이 무덤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나뒹굴 땐 얼마나 웃겼는지....
그 순간만큼은 무덤과 물아일체가 되었고 무덤을 많이 좋아했다.
그런데 그 신성? 한 곳에서 공부도 못하는 영구가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머리에 버짐이 나서 안 그래도 못 생긴 영구가 콧물도 안 닦고 뭐가 그리 좋은지 세상모르고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분노에 갑자기 가방을 열어 두꺼운 책받침을 꺼냈다. 플라스틱 얇은 받침이 아니라 톱밥을 짓이겨 만든 두꺼운 받침으로 영구의 빡빡머리를 내리찍었다.
" 야! 이 무시마야, 공부도 못하는 게 어디서 웃고 있노! 빨리 내 무덤에서 꺼져라"
공부 못한 죄로 영구는 한마디 댓구도 못한 채 도망을 갔다.
책받침을 들고 위협하던 난 그때 보았다. 영구 머리에 한 줄로 쫘악 피가 송송 올라오는 것을 ㅜㅜㅜ.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그렇게 때렸으니 대형사고를 친 거다.
하지만 난 분이 안 풀렸고 피가 나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영구 엄마가 따지러 오지도 않았고 그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동창회에서 처음 영구를 본 날...
"야 , 니 내 머리 때려서 피 난 거 아나?"
"알지 왜 몰라. 그때 공부 좀 하지 그랬어"
"내 그때 아파서...."
"모르겠고 니 때문에 맨날 꼴찌 한 건 아나?"
"꼴찌 아니다...."
"맞다. 꼴찌 맞다니까. 우리 12등 달고 살았는데 뭐가 아니고..."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둘 다 기억이 있고 아직도 그 일에 대해 서로 날을 세우는 걸 보면 나와 영구는 영원한 트라우마로 가져가겠구나 싶다.
때린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기에 난 아직도 반성을 안 한다.
무덤에서 싸운 이후로 예전만큼 그곳에 자주 가지 않았다.
사건장소를 회피하는 일종의 범죄 심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무덤이 시시하고 작아서 재미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졸업하던 무렵에 봉분은 거의 없어졌고 나중엔 아예 사라졌다. 비 오는 날 비닐조각을 보고 귀신을 봤다고 누가 소문을 냈고 우린 그렇게 조금씩 무덤이 있는 그 길을 영영 가지 않았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고 고향도 떠났기에 내가 다시 그 길을 언제 가보겠냐마는 그 세 분의 무덤 주인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그때 당신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 매일 올라가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무덤 납작하게 만든 거 더 죄송합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