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철학으로 알아보는 바람직한 인간상
인간의 정신은 언제 성장할까.
매일 원하는 것들만 할 수 있다면 과연 성장할까?
친구들과 놀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다면 자연스럽게 성숙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정신과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통 받아야 한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생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행복한 상황에서 굳이 철학적인 사유를 하지는 않는다.
행복한 당신을 떠올려보라.
‘나’가 어떤 사람인지 사색하는가?
즉, 나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언제 분노하고, 언제 슬프고, 언제 사랑하는지 생각하는가?
혹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어떤 의미였을지 구태여 고민하고 괴로워하는가?
마지막으로, 어떤 ‘삶’이 행복하고 바람직한 삶인지 고뇌하는가?
대부분은 이 질문들에 대해 ‘예’라고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행복할 때 불행을 예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행할 때 비로소 간절히 행복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사유하면서 영혼과 정신이 성숙한다.
정신과 영혼이 성숙한 사람들은 항상 일정하다.
감정의 동요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
기쁘되 과하지 않고,
슬프되 우울함에 잡아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본인이 해야 하는 일들을 책임감 있게 해 나간다.
이러한 여유롭고 단단한 정신력은 깨지지 않는 행복이 된다.
동서양 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인간상을 바람직하게 여겨왔다.
고대 중국 춘추시대 사람이었던 공자는 중용의 미덕을 강조했으며,
근대 독일의 철학자였던 니체는 이들을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칭했다.
위버멘쉬는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 성숙의 3단계 중 마지막을 차지한다.
즉,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 성숙의 첫 번째 단계는 ‘낙타’이다.
낙타는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넌다.
인간이 낙타에게 심을 싣고 사막을 건너가게 해도 낙타는 그저 따른다.
낙타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이 살아간다.
그들은 사회의 관습과 규범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그리고, 주어진 과제를 완수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는다.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 성숙의 두 번째 단계는 ‘사자’이다.
견디고 순종하던 낙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서서히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차 사자가 되어간다.
사자는 사회의 기존 관습과 규범에 저항하고 싸운다.
낙타가 “나는 해야한다.”라고 말할 때, 사자는 “나는 하겠다.”라고 말한다.
즉,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오기와 반항만이 남은 사자는 반항만 할 줄 알기 때문에 그것에 큰 괴로움과 허무만을 느낀다.
낡은 가치를 파괴하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관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니체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 성숙의 세 번째 단계는 ‘어린아이’이다.
오기와 독기로 가득한 사자가 다시금 ‘순수함’을 얻으면 ‘어린아이’가 된다.
어린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삶을 하나의 놀이로 바라보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블록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를 상상해보라.
‘다들 어떻게 하지?’, ‘규칙이 뭐지?’
그는 묻지 않는다.
그저 만들 뿐이다.
어른은 과거에 얽매여 투자한 시간과 매몰 비용을 걱정하지만,
아이는 어제 공들여 만든 모형을 부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을 즐긴다.
어린아이는 낙타와 달리 ‘스스로’ 판단하고,
사자와 달리 ‘아집’을 버린다.
이것이 위버멘쉬의 모습이다.
낙타는 말한다.
“타인이 나를 정해.”
사자는 말한다.
“내가 나를 정해.”
어린아이는 말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책 <데미안>은 ‘싱클레어’라는 어린아이의 성장을 담고 있다.
작은 마을의 학교에 다니는 10살 에밀 싱클레어는 신앙심이 아주 깊고 깨끗하며 부드럽고 밝은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소년이다.
어느 날부터, 그는 공립 학교 5학년생 프란츠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싱클레어가 보기에, 크로머는 다른 아이들의 물건을 뺏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어두운 기운이 풍기는 아이’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 그리고 가치관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크로머를 보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던 도중, 반에 성숙해 보이는 전학생 ‘막스 데미안’이 등장한다.
작중에서 데미안은 계속해서 싱클레어의 신념과 가치관을 흔든다.
“아벨을 죽인 카인이 이마의 표식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게 아니야. 그가 강자이기 때문에 신에게 보상을 받은 것이지.”
“진실은 나중에 깨달을 거야.”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때때로 싱클레어는 다시 신앙심을 회복하고, ‘착한 아이’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데미안에 의해서 악하고 어두운 현실을 마주하고 고뇌하게 된다.
싱클레어는 생각한다.
‘내게 펼쳐져 있던 밝은 세계를 내 발로 짓밟았어.’
그는 이미 어두운 세계의 한복판에서 떠받들어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방학을 맞아 따뜻한 집에 돌아온 싱클레어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밝은 세상 속에서, 자신만이 너무나 어둡게 느껴졌던 탓일까.
이후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의 우정, 에바 부인에 대한 짝사랑, 전쟁 등의 많은 사건을 통해서 다시 마음을 치유 받기도 하고, 또다시 어두운 경험과 생각들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소설 후반부,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는 폭격을 받고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임시 병동의 땅바닥에 깔린 잠자리 위에서 깨어난다.
그의 옆에는 막스 데미안이 누워 있었다.
아직도 여러 생각들로 혼란스러워하던 데미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꼬마! 프란츠 크로머를 기억하나?”
“언젠가 다시 나를 찾아도 예전처럼 직접 가 줄 수는 없어. 그때는 너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불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에바 부인이 보내는 키스라면서, “눈을 감아, 싱클레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피가 흐르는 싱클레어의 입술에 키스한다.
그 순간 잠에 든 싱클레어는 깨어나자마자 데미안이 있던 곳을 찾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 일어난 모든 고통스러운 일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저 데미안의 말대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두운 거울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데미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싱클레어가 곧 데미안이었으며, 자신 스스로 극복할 방법을 찾아나가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헤르만 헤세가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헤르만 헤세와 니체는 동시대 사람이다.
헤르만 헤세가 니체보다 고작 33년 늦게 태어났을 뿐이었다.
그래서, 니체의 관점에서 작품 <데미안>을 분석해 보았다.
어린 시절, 싱클레어는 낙타였다.
본인이 신앙을 가지고 선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모태신앙이었던 그에게 종교는 하나의 세계였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자문 따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의심’을 심어주는 존재인 ‘데미안’이 등장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최초의 의심을 품을 수 있도록 돕는 인물이다.
낙타였던 싱클레어는 서서히 알을 깨고 조금씩 사자가 되어간다.
기존의 세계가 무너지고, 파괴되면서 싱클레어는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다시 회복되기도 한다.
그러한 셀 수조차 없는 반복의 과정 속에서,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고뇌했다.
소설 후반부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마지막 말을 기점으로, 타인이나 사회의 생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서 탈피하여 본인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위버멘쉬가 될 것임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난다.
나는 데미안을 2번 읽었다.
처음 읽었던 순간을 회상하기 위해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렸을 적, 기독교 신앙이 짙게 남아 있던 14살의 황인찬은 책을 읽으며 괴로웠다.
싱클레어가 바뀌어가는 모습은 마치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사탄에게 속아 타락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데미안의 영향을 받아서 술을 마시고, 악한 범죄를 저지르며,
그럼에도 고통스러워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나를 너무나 괴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절반도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었다.
그 후로 약간의 회의를 느낀 나는 중,고등학교 내내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신앙적으로는 약간의 회의심이 생겼지만, 그래도 14살의 황인찬은 순수한 꼬마였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며,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사명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후로는 그저 쭉 공부만 했고,
고3 입시를 무사히 마친 뒤 나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부모와 사회는 내게 ‘대학만 붙고 나면 인생이 행복해질 거야!’라고 했었다.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오히려 허무했다.
괴로웠다.
나는 아직도 지식이 없는 무지렁이였고, 능력 없는 한낱 대학생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하루종일 끊이지 않는 의심과 고뇌의 굴레가 시작됐다.
‘사회성이 없는 내가 과대표를 어떻게 해야할까?’
‘사회성은 어떻게 키워야 하지?’
‘찐따같은 성격은 어떻게 고쳐야 할까?’
처음에는 조잡한 유아적 고민부터,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면 왜 고통받는 나를 내버려두시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친구들은 내가 연애를 하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과연 못할까?’
나아가서 고차원적이고 도전적인 의심까지.
이때가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책 <미움 받을 용기>를 읽은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심리학자 아들러, 그의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심리학 사상은 니체에게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의심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책과 성경책을 읽었고, 교회에 나가고, 연애를 해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렇게 교회 형, 누나들에게 사회성 문제로 많이 깨지며 사회를 배웠고,
수없이 많이 차이면서 두려움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하나하나씩 의심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의 지식과 경험이 쌓였었기 때문이리라.
능력이 생기고부터는 내 모든 사고체계를 파괴하는 데에 집중했다.
오류로 가득했던 사고방식의 논리들을 근본부터 논파하며 나만의 가치관을 확립해 나갔다.
‘내가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날 싫어할거야.’
-> ‘그 사람의 생각은 알 수 없으니, 대화를 통해 물어보는게 나아.’
‘부모님이 믿으시니까 나도 크리스찬인 거겠지.’
-> ‘성경은 단지 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으로도 상당히 본받을 만해. 그리고 나는 매 순간 축복을 받아왔으니, 약사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감사하게 살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이게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해.’
‘실패가 너무 두려워. 도전만 하면 매번 실패하고, 차이는데 더 도전할 가치가 있을까?’
-> ‘실패와 헤어짐은 항상 나에게 교훈을 남겼고, 내가 한 층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 운명애(Amor fati)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리고, 지금도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나 자신의 판단하에, 내 가치관을 계속 확립해 나가고 있다.
저번주에 자기 전에 우연히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데미안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책을 펴서 읽어보았는데, 공감이 되지 않았던 14살 때와는 다르게 주인공 싱클레어를 나와 동일시하며 읽을 수 있었다.
작가가 살던 시대에 만연했던 철학을 알고, 다양한 경험을 한 상태에서 읽은 데미안은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주인공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인간상을 상징하는지,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싱클레어는 어릴 적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관(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기독교적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판단’하에 자기만의 신념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나는 싱클레어의 성장 과정이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강조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자’의 단계, 즉, 고통이 수반된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하고, 그리고 사유해야 한다.
내가 이 과정을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깊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유의 과정을 극복하고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고된 경험을 한다면,
당신은 분명 순수함을 간직한 위버멘쉬가 될 수 있으리라.
수능을 앞둔 당신은 운명애(Amor fati)를 기억해야 한다.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기쁨이 될 것이다.
만약 원치 않는 결과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한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라.
지쳐 쓰러져 낙오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결국 극복해 내어 끝내 위버멘쉬가 될 것인가?
선택하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