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진 Jan 01. 2024

러블리즈 <A New Trilogy> 리뷰

그리고 케이팝에 대한 단상

내가 지난 몇 년간 꽤 열성적으로 좋아했던 그룹 러블리즈. 활동이 일단 마무리 된 지금 팬, 리스너이자 리너스(팬 네임)로서 뒤돌아보면 가장 많이 다시 찾게 되는 앨범 중 하나는 타이틀곡 "Destiny"로 대표되는 <A New Trilogy>이다. (다른 하나는 러블리즈의 2번째 정규앨범 <R U Ready?> 이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팬들 사이에서도 이 앨범은 "ANT" 혹은 "어뉴트" 로 줄여 불리우며 명반이라 평가받곤 했는데, 여기서 나는 한 명의 팬이자 감상자의 입장에서 내가 왜 이 앨범을 좋아하는지 적어보려 한다.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딱히 평론이 아니다. 주관적 감상문에 가까운 글이자 팬의 소고라고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따라서 모든 곡을 순서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깊게 혹은 비평적으로 다룬다기보다는 나의 주관적 인상에 약간의 객관적 요소를 덧붙여 글을 썼다.


1. 인트로


이 앨범은 상당히 인상적인 인트로를 가지고 있다. 2번 트랙인 타이틀곡 "Destiny"와 사운드와 분위기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인트로인 "Moonrise"는 다소 전통적(?)인 마법소녀 이미지와 상당히 하드한, 그러나 부드러운 일렉 사운드를 아주 촘촘하게 배치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는 프로듀서 윤상의 직접적인 영향일 것이다.


https://youtu.be/Ix0DCb84sUA?si=L_QyM0Mgx_d2rHra

앨범의 인트로 "Moonrise"

힙합 느낌의 킥이나 베이스, 그루비한 리듬을 기반에 둔 많은 곡들과 달리 이 인트로 (그리고 사실 앨범 전체)는 스트레이트한 요소의 배치를 통해 상당한 세련미를 연출하고 있다. 또한 중반부 이후 곡이 진행됨에 따라 저음부를 채우는 악기들은 펀치력을 더해 다소 격한 느낌의 타이틀곡과 자연스러운 연결지점을 만든다. 개인적으로 이 인트로를 들으면 거대한 무대에서 열린 연말 공연의 등장 순간을 시각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이런저런 말을 적었지만 내가 무엇보다 이 인트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앨범과 그룹의 이미지를 너무도 적절히 보여주고 그 그림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히 많은 소리가 복잡하게 사용된 듯하면서도 모두 질서 정연하게 연주되는 점이 인상 깊다. 차갑지만 호소력 있다.


2. 타이틀곡 "Destiny"


러블리즈의 곡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노래는 아마 "Ah-Choo" (아츄) 일 것이다. "Destiny"는 아츄의 대중적 성공 이후 발매된 곡인데 당시 계절감, 아츄와의 연결성 면에서 아쉽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동감하는 부분이 상당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완성도는 여타 아쉬움을 내 마음속에서 불식시킨다. 


https://youtu.be/S_IBk0RCsOo?si=iY1XAhhw-BMDuq7f


날카로운 스트링과 함께 후렴으로 바로 시작되는 이 곡은 라틴 음악 같기도, 마이너한 발라드 같기도 한 멜로디와 함께 댄스음악으로서의 캐치함과 몰아치는 사운드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방금 '몰아친다' 고 했는데, 화려하고 존재감이 강한 스트링이 드럼, 수퍼소(super-saw) 신디사이저와 함께 빠밤빠바밤 짠짠짠 하는 걸 듣고 있으면 나로서는 '몰아친다' 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기 힘들다.


테마 멜로디(후렴에 나오는 그것)가 워낙 특이하면서도 강력하지만 그만큼 코러스나 기타 아르페지오 등 디테일한 요소도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이다. 보편적인 듀엣 느낌의 코러스나 엷게 깔리는 패드(pad) 느낌의 코러스뿐 아니라 사운드이펙트처럼 사용한 코러스는 뭔가 멜랑콜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브릿지가 시작되는 부분, "한번~" 이라는 가사 직후의 "하우~"가 대표적인 예시) 또한 후렴으로 향하기 직전 프리코러스 부분에서 라틴음악같이 강렬한 색을 주는 기타 아르페지오도 매력적이다.


이 곡을 이야기할 때 가사와 뮤직비디오의 구성도 빼놓을 수 없다. 데스티니는 가사 측면에서 비유로 유명하다. 화자를 달, 청자를 지구, 그리고 청자인 지구가 사랑하는 제3의 상대를 태양으로 두어 '이중 짝사랑'을 연출했는데 이러한 비유를 가사 전체에 일관적으로 가져가며 그 이미지성, 참신함을 동시에 충족한다.


넌 나의 지구야 내 하루의 중심

왜 자꾸 그녀만 맴도나요 

달처럼 그대를 도는 내가 있는데 

한 발짝 다가서지 못하는 이런 맘 그대도 똑같잖아요 

(...)

내겐 하루가 꼭 한 달 같은데 

(...)

잔잔한 그대 그 마음에 파도가 치길 

너는 내 Destiny 날 끄는 Gravity


가사를 보면 달과 지구, 태양을 그 비유로 사용한 점을 알 수 있으며 실제 천체의 속성을 곳곳에 녹여냈음을 알 수 있다.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궤도를 따라 공전하며 이는 "그대", 즉 지구도 똑같다. "하루가 꼭 한 달 같다"는 것은 그 주기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대(지구)"에 파도가 친다는 가사는 지구에 대한 달의 인력의 영향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선명한 비유를 쓰면 다소 억지스럽거나 끼워 맞춘 느낌이 들 수 있다는 위험이 있는데 이 곡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이 곡은 얕게 들어도 자연스럽고 깊게 들으면 깊게 파고들 구석 또한 갖춘 곳이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앵글이 계속해서 회전한다. 나는 영상은 잘 모르지만 이처럼 계속 동질적인 장치가 나오면 지루하거나 난잡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자연스러움 속에 의도가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멤버들의 코디나 표정, 색감과 같은 부분도 청순 컨셉 걸그룹 하면 떠오를 듯한 이미지에서 살짝 변주가 들어가 서늘함을 내뿜는다. 곡이 가지는 슬픔, 그리고 약간이나마 있는 원망의 정서와 잘 묻어나는 이러한 이미지는 절제 속에서 정서를 드러내는 곡의 진행, 분위기, 가창 등 많은 요소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러블리즈의 곡들은 나의 음악세계에 없었던 부분을 채워줬다. 나는 어렸을 적 (지금도 이런 말을 쓰기엔 좀 민망할 정도로는 어리긴 하다) 오아시스나 라디오헤드 같은 브릿팝, 성시경 등과 같은 발라드를 주로 들었다. 따라서 비주얼적 요소나 댄스, 리듬이 중요한 음악에 대해서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약간 내적으로 무시(?) 하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러블리즈와 그 음악들은 이처럼 좁았던 내 음악관에 균열을 내고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을 선물했다. 물론 스트레이트한 리듬이라던지 발라드에 기반한 감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러블리즈 음악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새로운 음악이 맞는지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그 틀 안에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을 체험할 수 있었다고 답변할 수 있겠다.


어떤 분들은 케이팝 아이돌 음악의 음악성이나 진정성에 회의를 던지기도 하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다인조 그룹의 경우 넓은 표현의 폭이라는 장점을 가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설득력과 실험성 사이에서 허용되는 운신의 폭이 꽤나 넓은 형태의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또한 기획-제작이라는 프로세스를 통한 음악 생산은 딱히 케이팝 음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또한 그와 같은 제작 과정의 존재가 아티스트가 자기만의 컬러나 캐릭터를 찾아내야 한다는 점을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어떤 작품이 특정한 장르에 속했다고 해서 그 작품이 그대로 '음악적'인 것은 아니다. 좋은 힙합이거나 별로인 힙합, 엄청난 발라드이거나 별로인 발라드가 한 장르 안에 같이 있을 수 있듯 아이돌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옆 전공으로 바꾼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