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지루한 작품, 작품과 비 작품의 대립
영문학에는 정전(canon)이라고 하는 목록이 있다. 당연히 영문학 밖에도 있는 말이겠으나 내 1전공이 영문학이었던 관계로 이 단어가 익숙한 맥락이 영문학이다. 정전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나는 셰익스피어, 밀턴, 나보코프, 메리 셸리, 제인 오스틴 등이 생각난다. 순전히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정전, 고전이 주는 사회적 이미지는 크게 두 갈래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연구하고 감상해 마땅한 대상이며 무언가 신비함까지 갖춘 '작품'. 다른 하나는 알고는 있으나 아무도 읽지 않는 '대충 지루한 작품'.
여기서 작품이라는 개념은 꼭 고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현대 작가나 작품도 어떤 진지함을 가지면 연구 대상, 문학 목록에 '합격' 하는 것 같다. 어떤 교수님께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로 논문을 작성하시기도 했다. 반대로 명백히 고전이지만 연구 가치가 없거나 사상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이 목록에서 잘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 작품이라는 말은 일종의 문학으로서 자격을 상징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시선에 따르면 감상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작품과 작품이 아닌 애매한 물건이 나뉜다.
이런 이분법적 시선으로 작품의 세계를 나누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칼같이 자르는 사람도 꽤 있다고 느꼈다. 예를들어 웹소설과 기존 문단의 갈등에서 표출되는 단어들, 뭐 '고급중간문학' 같은 표현을 보다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고 유동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문학적 가치라는 개념을 통해 작품들의 등급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는 축이다.
창작 방식이나 시대, 담고 있는 소재 등이 바뀐다고 뭐가 그렇게 본질적으로 바뀌겠냐는 것이 내 생각이다. "태어날 때 부터 그냥 인간이 강함" 과 같은 웹소설식 제목 붙이기 관행은 수백년 전 과거에도 이미 있었던 것이지만 그렇게 이름이 붙은 작품을 두고, 그 이유로, 문학이 아니라고 하기는 좀 많이 애매하지 않은가? 좀 더 오래된 예시로는 SF(과학소설)과 같은 소위 '장르문학' 취급이 박했던 역사를 들 수 있는데 이처럼 어떤 형태의 작품에 대한 무시, 조명의 부재는 반복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물론 어떤 시선에서 보기에 더 적절한 작품과 해석이 있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단일하고 지배적인 문학 해설과 작품 선별 매커니즘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면 문학을 더 풍부히 감상하고 감명깊게 읽는 여러 방식을 저해하지 않을까? SF라는 이유로 전통적 문학성도 충만한 작품이 격하된다거나, 웹에서 연재된 게임소설이라는 이유로 무시받거나, 소설의 '재미있는' 속성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비평에서 사라지거나...
고전 중의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서 모 전공 교수님 (여담이지만 미국인이시다)과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난다. 셰익스피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느냐는 나의 가벼운 질문에 교수님은 그 시절 어벤져스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쉽다고 하셨다. 나는 꽤 동감했다. 왜냐면 이유가 단순한데, 햄릿을 읽었더니 직관적으로 '재미' 있었다. 그리고 재미에서 비롯된 내 흥미는 나로 하여금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해 더 알아보고 언어적, 사회적, 문학적 요소도 더 찾아보게 만들었다.
작품에 가치를 매기거나 등급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으면 오히려 고전과 정전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더 다면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의 재미를 계기로 당시 사회적 긴장관계를 경험한다거나, 웹 연재 게임소설에서 문학의 반복되는 구조를 읽어낸다거나 하는 식의 독해, 소비 방식을 통해 문화나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다양성과 개인성은 사회성과 같은 외적 요소와 함께 문학의 본질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딱히 근거를 찾아보기 힘들어 보이는 격하와 갈등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더 심층적이고 다양한 문학적, 문화적 생활이 펼쳐지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다. 유명한 고전문학을 '지루한 작품' 이라서 평생 읽지 않던 사람도 햄릿을 펼쳐 볼 수 있을 것이고 웹툰이나 만화, 드라마를 별다른 이유 없이 보지 않던 사람이 한 번 쯤 시도해볼 수도 있을 태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