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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햄 May 20. 2021

여름 냄새는 나만 맡을 수 있다

언제나 여름이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다 보니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마스크의 작은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약간은 얇은 마스크로 바꿀 때가 된 건가.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한 지 1년이 훌쩍 지났다. 5살인 첫째 딸은 이제 마스크 없이는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덕분에 더 이상 어린이집에서 감기를 옮아오는 일은 사라져서 좋기도 하지만 답답한 마스크를 자기가 먼저 챙겨 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씁쓸한 기분이 들 곤 한다.


처음에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너무 답답하고 싫었다. 게다가 지갑도 종종 놓고 다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마스크란 더없이 귀찮은 존재였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더 이상 아침에 공들여서 화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회사에서 미팅도 모두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점심 식사도 각자 하게 되어 생얼로 회사를 가는 것이 편해지게 되었다.


화장을 안 하다 보니 출근 전 아침이 여유로워졌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여름 냄새가 난다. 마스크 때문에 밖에서는 마음 편하게 맡을 수 없는 여름 냄새를 한껏 느끼고 나서야 나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여름이었다. 14살 나이에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도.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도. 모두 여름이었다.


미국 텍사스의 뜨거운 여름 공기가 처음 내 피부에 닿던 순간을 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모님 없이 혼자 탄 비행기에서 12시간 동안 느낀 두려움이 설렘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 이 곳이 미국이구나.


미국의 학교는 여름에 시작해서 여름에 끝난다. 처음 가 본 미국의 학교는 신기했다. 과목마다 돌아다니면서 수업을 듣다 보니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한국어는 들리지 않았다. 설렘이 다시 두려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적잖게 인종차별을 당했으며 나는 자신감을 잃고 위축되어 갔다. 한국 친구들 사이에서는 나름 '인싸' 였는데. 이제 나는 존재감 없는 아시아인일 뿐이었다.


텍사스의 여름은 유독 덥고 길다. 한국의 습한 여름에 익숙했던 나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뜨거운 텍사스의 여름에 익숙해지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친구들을 사귀고 영어 실력이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학교 생활이 즐겁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푹푹 찌는 8월의 어느 날,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6년 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한국의 습한 여름 공기였다. 코 끝에 남아 있던 미국의 여름 냄새와 한국의 여름 냄새가 어우러져 가슴을 설레게 했다. 새로운 챕터의 시작이었다.






나의 기억 속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여름 냄새들은 하나로 합쳐져서 오늘도 내 주위를 맴돌며 마음을 간지럽힌다. 분명 나쁜 냄새들도 섞여 있었는데 향수의 잔향처럼 좋은 냄새만 남아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살다 보면 또 다른 여름 냄새들이 스며들겠지.


그리고 이 여름 냄새는 평생 나만 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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