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물(연필과 지우개)
매일 엽서 한 장 크기의 그림을 그린다. ‘매일 15분 그림’을 시작한 지 스물네 번째 되는 날, 지중해 석양 아래 맨발로 걷는 나를 그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책상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딸이 멀리서 찍어준 사진 속의 나. 먼저 수평선을 붙잡고, 구름과 태양, 모래 언덕을 얹은 뒤, 작은 인물 하나를 그 위에 세웠다. 스케치는 빠르게, 허투루는 아니게.
스테들러 0.3mm 펜으로 연필선을 따라가며 형태를 세웠다. 머리카락의 흐름, 머플러의 주름, 손과 발의 방향을 짚어 넣었다. 구름은 엉성한 듯 연결하고 파도는 가볍게 흔들리게 두었다.
노란 떡 지우개로 연필 자국을 지웠다. 힘 들이지 않아도 흔적이 정리되는 신기한 기적. 지우개는 언제나 지나간 선을 말없이 거두어간다.
작은 직사각형 팔레트를 열고 물붓으로 색을 얹었다. 파랑의 명도와 채도를 달리해 바다를 만들고, 황톳빛 모래와 분홍 기운의 석양을 더했다. 색이 더해지자, 종이 위 풍경이 숨을 쉰다.
작업을 마친 도구들은 작은 검정 그물망 파우치에 차곡히 넣었다. 한 달째 반복되는 저녁 루틴. 스케치북을 덮으며 하루도 마감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로 사물과 주변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먼저 사물의 크기를 가늠하고, 입체를 살피고, 구도와 위치, 조화까지 눈에 담는다. 커피잔을 앞에 두고도 손잡이의 곡선과 받침의 깊이를 헤아린다. 갈색 액체가 남긴 흔적, 굳어가는 거품의 자국까지 빠뜨리지 않는다. 식당에 들어가면 테이블의 형태와 매트의 질감, 물컵의 투명도, 포크와 나이프 손잡이의 균형, 벽지 무늬와 액자의 틀까지 시야에 붙잡는다. 그림이 될 법한 장면은 사진으로 남긴다. 한 번, 또 한 번 그렇게 순간을 저장했다.
예전의 나는 사물을 대략적으로만 보았다. 첫눈에 보이는 윤곽이면 충분했다. 그림은 감춰진 부분까지 집요하게 응시해야 한다. 때로는 그 물건이 지닌 의미와 시간까지 더듬어보게 된다. 매번 그렇게 산다면 피곤하겠지만, 그 피로는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3주를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고 했던가. 요즘 나의 시선은 지면을 채울 한두 개의 사물에 자연스레 머문다. 이런 연습을 하면서부터 나는 천천히 걷게 되었다.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던 걸음을 늦추고, 한 곳에만 고정되던 시선을 풀어 주변을 살핀다. 때로는 일부러 다른 골목을 돌아가기도 한다.
이집트에 와서는 더욱 그렇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을 피하듯 빠르게 지나쳤다. 호기심 많은 관찰자 시점으로 바꾸게 되면서 풍경이 달리 보였다. 이면을 살피고 의미를 부여하니, 거리의 표정도 다르게 읽혔다. 보물처럼, 비밀처럼.
산책 중에 발견한 동네 가까운 'TEEPEE' 기념품 가게도 그랬다. 현지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입구를 따라 지하로 들어갔다가 마주한 공간. 영어가 유창한 백발의 주인은 조금도 깎아주는 일 없이 정찰제로 물건을 판다. 그런데 하나같이 물건이 마음에 든다. 이제 그곳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들르는 장소.
시민들을 위한 수도 시설도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낮은 철제 구조물에 달린 수도꼭지에서 가난한 현지인들이 물을 받아 마시는 모습. 무더운 날 나그네들에게는 오아시스를 만난 듯하겠다. 내가 스쳐 지나는 풍경 속에서도 정감 있는 이야기들을 길어내는 중이다.
관찰하고 그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나는 조금씩 느긋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해변 모래사장을 걷다가 원목 의자 뒷면 등이 닿을 지점에서 곡선과 두 줄 홈에 눈길이 갔다. 그런 나 자신이 낯설어 혼자서 웃었다.
연필로 그리고, 지우개로 지웠다가, 펜으로 선을 세우고, 물감으로 생기를 더하는 이 단순한 과정이 내게는 특별한 감사다. 평범했던 사물들이 하얀 지면 위에서 이야기가 되는 기적.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면서 스케치북을 채울 의미 있는 하루를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 따뜻한 라테도, 푸른 야자수도 그 위에 얹힌다. 때로는 먼지 가득한 자동차와 그 위를 덮은 고양이도 등장하지만 말이다. 오늘도 나는 무언가를 그리려 주변을 둘러보고 하루를 떠올리는 중이다.
연필이 기록과 기억의 도구라면,
지우개는 삭제와 망각의 도구다.
.
.
연필 끝에서 하나의 이름이 불려 나오고
하나의 이야기가 생기고 하나의 세계가 태어날 수 있다면,
지우개는 그것들을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할 힘이 있다.
지우개는 자신의 몸을 허물어 연필이 만들어놓은
무질서한 먼지들의 세계로 데려다 놓는다.
연필이 그려놓은 윤곽선들은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고,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경쟁자가 아니다.
안규철[사물의 뒷모습]
<매일 들여다 본 이집트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