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로등
“어머니, 눈이 쏟아져요.”
까만 외투 모자 위에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자취방으로 들어온 아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거 첫눈 맞지?”
지난 12월, 아프리카에서 서울에 잠시 들렀다가 고대하던 첫눈을 만났다. 그것도 펑펑 쏟아지는 새하얀 함박눈. 일기예보대로 두 시간 동안 내린 눈은 지면 위에 5센티미터쯤 소복이 쌓였다.
저녁밥을 차리다가도 현관문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쏟아지는 눈 속을 잠시 걸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바라본 눈발의 세기. 화산재처럼 빠른 속도로 쏟아진다. 밤중이라 새까맣던 골목 바닥은 불과 몇 분 만에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서울 골목의 눈길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황금길만큼 반짝거렸다.
하늘은 눈송이를 총알처럼 쏟아내던 동작을 휴전하듯 멈췄다. 아들의 긴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전날 새로 산 목 높은 워커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 앞에서부터 하얀 발자국이 인장처럼 차례로 찍힌다.
나무 계단을 내려가니 아무도 걷지 않은 뽀얀 눈길이 이십 미터쯤 이어져 있었다. 이제 막 내린 함박눈 골목길은 물에 젖은 모래사장처럼 단단하고 안정적이다. 가로등만 비치는 조용한 골목을 혼자 세 번이나 왕복했다. 조금 더 멀리 골목 밖으로 나가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에도 흥이 묻어난다.
“우리 이렇게 저녁 먹으러 가는데 뽀득뽀득 눈길을 걷다니. 호호호.”
앞서 걷던 멋쟁이 세 할머니의 대화 속에는 내 마음과 꼭 같은 즐거움이 담겼다. 털모자에 장갑과 부츠까지 단단히 무장한 그녀들의 뒷모습이 노란 가로등 아래 작은 그림처럼 멀어져 갔다.
맞은편 골목 가로등 아래로 누군가 긴 막대 자루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가만히 서서 빛 아래 선 중년의 여성을 지켜보았다. 눈이 올 때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는 제설삽을 들고 골목 사거리부터 눈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눈이 바닥에 들러붙어 치우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다. 불도저를 밀 듯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자 솜이불 같던 골목길이 천천히 검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는 말없이 사방을 정돈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나의 존재를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가로등 아래에서 묵묵히 움직이는 그녀의 손길과 발걸음에 감탄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눈길을 걸으면서 긴 밀대로 길을 만들던 그녀를 떠올렸다. 아들의 자취방에 들어가 두꺼운 박스를 길고 반듯하게 찢어냈다. 집 앞에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옆집 자취생들의 현관 앞에도 작은 길을 내주었다.
이제 막 쌓인 눈은 약간 무거운 밀가루처럼 부드러워 밀어내기 쉬웠다. 계단을 치우고 내려가 십 미터 넘는 새하얀 골목 위에 까만 길을 만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이 골목에 사는 이웃들이 안전하게 밤길과 새벽길을 걸을 수 있겠지. 아침에 과외를 나가는 내 아들도 이 길을 지나겠지.'
가로등 아래서 묵묵히 길을 만들던 그녀에게 배운 마음. 나 역시 누군가의 인생을 잠시라도 비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그랬듯,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가로등은 우리에게 거꾸로 말한다. 어둠 속에서 빛의 진정한 힘은 어둠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지 않다고. 가로등의 역할 은 사방의 어둠 속에서도 빛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을 예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함돈균 <사물의 철학>
"외롭고 두렵고 힘겨운 인생 도정을 덜 외롭게, 덜 두렵게, 덜 힘겹게 살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만남이어야 한다. 해 질 무렵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가로등처럼 우리의 인생길을 서로가 밝혀주는 불빛이 되자."
김후란 <아름다운 우리 수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