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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연 Sep 27. 2023

왕자님을 만난 무수리

예순셋 할머니의 콩고물 수다

난 가끔 남편이 전생에 얼굴은 그저 그렇고 시력이 좀 많이 안 좋은 부자 나라의 왕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그 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어찌어찌 안 좋은 왕자의 시력 탓에 간택된 무수리?

무수리가 왕자와 혼인하는 게 시대상 맞지 않는다면 몰락한 양반가의 둘째 딸?


여기네 여기. 여기 딱 좋으네.

6월 말 남편 있는 제주도 갔을 때 남편 지인분 식사 초대로 갔던 지은 지 몇 달 안 됐다는 고급스러운 호텔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남편은 잔뜩 신이 나 안 그래도 큰 목소리가 두 배는 넘게 커져 쩌렁쩌렁 온 사람 다 들리게 대문짝 만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딸 가족 7월에 오면 아들네 딸네 다 불러서 여기서 묵어야겠다고... 손주들은 저기 저 야외풀에서 놀리면 되겠다고... 여기 아주 딱이라고...


아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어디서 들으니 이 호텔 방 두 개 하룻밤 숙박비가 기백만 원이라던데... 소리가 쑥 튀어나오려는 걸 잔뜩 들뜬 왕자님 김 빼는 소리 같아 꿀꺽 삼켰었다.

8월 초 성수기 예약이 꽉 차 우리한테 까지 차례가 안 온 것을 남편은 못내 아쉬워하였지만 나는 천만다행 손 안 대고 코 풀게 된 것이 좋아 남편 안 쳐다볼 때 슬쩍 몰래 웃었다.


그날 밥 먹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하도 아쉬워하길래 손주들 어릴 적부터 저리 좋은 것만 보고 다니면 못쓴다. 우리 나이 되면 뭘 보고 좋다 하겠느냐? 그것도 마냥 좋은 거 아니다 하였더니...

그렇게 키우면 쭉 그렇게 살게 되는 거야.

더 좋은 거 새록새록 나올 텐데 별 쓸데없는 걱정 다 하고 있네.

돈을 그럴 때 쓰려고 벌지 왜 벌어? 쥐어박는 소리를 하였다.


그럴 때 쓰려고?

남편은 저럴 때 쓰려고 돈을 벌었구나.

그럼 나는 어디에 쓰려고 돈을 벌고 모았을까?


생각해 보니 나는 평생 어디에 쓰려고 돈을 벌지 않았다. 주변의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돈을 벌었다.

부모 없이 사는 조카들이 돈을 꾸러 왔더라.

꿔가면 갚지도 못할 것이 뻔한데... 혹여 이런 구차한 소리를 듣게 될까 겁이 나... 딱한 우리 형편 아는 척해 봐야 해결해 줄 길도 없으니 조카들 만나는 것을 꺼리고 피하다 아주 연락 뚝 끊어 버리면 어쩌나 외로운 처지 되는 것이 두려워 악착같이 돈을 벌고 허투루 쓰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주머니에 들은 돈은 내가 쓰든 남이 쓰든 다 없애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연년생으로 낳아 키우며 이러다 내 주머니까지 거덜 나 텅텅 비면 애들 공부도 끝까지 못 시키는 거 아냐? 시집 장가는?

그게 무서워 또 돈을 쓸 때마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나를 걱정해 줄 이모도 고모도 삼촌도 다 떠나고 이 세상에 없을 뿐 아니라 아들도 딸도 다 제짝 찾아 떠나 버렸으니  내 책임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 알량한 내 주머니 속 돈을 남편처럼 이런데 저런데 좀 써 보아야 할 텐데...


친구들 만나 비싼 밥도 사 먹고 경치 좋은 곳으로 구경도 다니고 분에 넘치는 것 같아 들었다 놨다만 했던 마음에 드는 가방도 하나 턱 사고 십 년 넘게 써 푹 주저앉아 버린 매트리스도 푹신하고 질 좋은 놈으로 골라  바꾸고....


아! 참

내년 여름엔 손주 셋 다 끌고 남편이 그리 가고 싶어 하던 고급스러운 그 호텔을 내 손으로 예약하여  정갈하게 차려진 조식도 다 같이 냠냠 맛있게 먹고 손주들 첨벙첨벙 튜브 타고 물놀이하는 것도  긴 의자에 누워 느긋하게 구경해야지.


서당 개도 삼 년이 지나면 풍월을 읊는 법인데 무수리가 왕자 만나 사십 년 가까이 살았으면 그 정도 흉내는 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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