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EP #3

남북정상회담의 서곡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구명의 동아줄


1998년 2월 25일. 제15대 김대진 대통령의 취임식 날.

태산그룹 명예회장 진태양은 집무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대통령의 선서가 울려 퍼지는 스크린 너머,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김영찬 前 대통령 모습이 잡혔다.


“그래, 정수대교 무너지고, 세풍백화점 붕괴되고, 아들놈까지 설쳐대서 망신을 당하더니 결국 나라를 IMF 구렁텅이에 처박고 내려오는구나. 인생만사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라 했거늘... 이제 내 마음을 조금은 알까. 불쌍한 양반. 쯧쯧쯧.”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다가 문득 자신의 처지라고 별반 나을 것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왔다. 김영찬 정권하에서 자신이 피땀을 쏟아 일군 태산그룹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그룹 모체인 태산건설은 금융권 신뢰도 저하로 공사 수주가 거의 끊겼고, 전자와 해운은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였다. 그나마 자동차 계열이 외형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거대한 유조선이 암초에 좌초한 느낌, 뼛속까지 스며드는 위기감이 그를 짓눌렀다.

왕 회장은 누구보다 상황의 심각성을 꿰뚫고 있었다.


사업 위기도 위기지만 더 깊은 불안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 요즘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회의 중간에 방금전까지 하려던 말을 잊어버려 사장단의 시선을 의식한 적이 몇 차례나 있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 생각이 들 때마다 한기가 등골을 훑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날카로운 통찰력과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눈치채고서도 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명훈이나 명기는 알아채지 않았을까?


'100살까지 경영을 하고, 그 이후엔 태산농장에 가서 소나 키우며 살겠다고 큰소리쳤는데, 허망하구나. 건강 하나만은 어느 누구 부럽지 않다고 자신했는데… 천하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러 천지 사방에 사람을 보냈지만 결국 저승길로 떠나지 않았던가.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긴 하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아니겠는가.'


'나도, 태산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내 건강이 더 위험해지기 전에, 태산을 회생시킬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노쇠해가는 자신의 상태와 비례해 절박감은 커져만 갔다.


TV속 김대진 대통령은 2월말 추운 날씨에도 장문의 취임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냉전적 남북 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합니다... 북한에 대해 당면한 3원칙을... 첫째... 둘째... 셋째,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이윽고, 한 문장이 그의 귀를 찢고 들어오자 가슴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순간 왕 회장의 눈동자가 커지고 몸이 굳어졌다. 전율이었다. 그 문장은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울렸다.


‘이거 뭐지? 이건 나한테 내려오는 구명의 동아줄인가?’


그는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지난 94년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고 칩거한 이후 대북사업을 재개하리라 계속해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89년의 고향 방문에서 시작된 대북사업은 제대로 된 루트를 못 잡아서인지 별다른 성과 없이 그냥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김 대통령의 취임사를 들으면서 북한과의 경제사업을 본격 추진할 수 있고 또 태산도 살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매장량의 지하자원, 백두산, 금강산, 칠보산 등 미개척 관광자원, 저렴한 노동력, 그리고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북한을 통해 파이프로 들여와서 일본까지 해저터널을 뚫어 판매하는 그랜드 플랜!


답은 북한에 있고, 길은 김대진 정권에 있었다.


김대진 대통령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김영찬의 정치 보복에 질려 사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김영찬의 평생 라이벌인 김대진 쪽을 지원해 왔고, 특히 이번 대선에도 적지 않은 지원을 했다.


“남북정상회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것만 성사시킬 수 있다면 태산은 살아날 수 있다.”

왕 회장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확실한 지푸라기를 찾아낸 심정이었다. 유명한 서양학자가 목욕탕에서 정답을 발견하고 뛰어나오며 외친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래, 유레카야, 유레카!'


급기야 그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요시다의 등장


왕 회장의 머릿속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당장 진명훈 회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진명훈 회장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왕 회장은 명훈이 앉기도 전에 다짜고짜 말을 쏟아냈다.


“대북사업 말이야. 제대로 해 볼 방법을 찾아봐. 제대로 북한쪽 수뇌부, 그러니까 김정일이와 바로 선이 닿는 자를 찾으란 말이야. 우회하지 말고, 곧바로 정공법으로 가. 정면돌파하란 말이야.”


진명훈은 최근 몇 년동안 아버지의 몰락을 곁에서 지켜보며, 냉정하게 단련되어 있었기에 당황하는 기색없이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예... 그동안 태산증권 이진수 사장에게 확실한 루트를 찾아보라고 지시 해두었습니다. 중간 보고로는 일본쪽 라인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오늘 취임사 봤어? 대통령 취임사 구해서 제대로 읽어봐. 김대진 대통령은 북쪽하고 확실하게 교류할 생각이 있는 것 같아. 특히, 남북정상회담 말이야. 우리한테 다시 오기 힘든 절호의 기회야. 반드시 잡아야 돼. 그래야 우리가 살아날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아버님.”


명훈은 자신의 사무실로 내려오면서 아버지 특유의 승부사 감각이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 불길이 자신에게 옮겨붙고 있었다. 그는 곧장 이진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북사업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예, 회장님. 일본 규슈大 고바야시 교수를 통해 북한 김용순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쪽을 노렸는데, 고바야시가 연결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시다에게 북 상층부에 줄을 좀 대달라고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89년에 명예회장님 방북 때 다리 놓았던 그 요시다? 그 사람, 북한에서 수산물을 받아다 일본에 파는 중개상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친구가 그만한 능력이 됩니까?”


“예, 직업도 그렇고, 국적도 일본이지만 한국계입니다. 특별한 점이, 이 친구 아버지가 김일성하고 친분이 있었다 합니다. 북한에는 주석하고 얼굴 한번 보고 인사만 해도 특별 대우를 받지 않습니까. ‘1호 접견자’라고. 아버지의 연줄 덕분에 당쪽 인맥이 상당하다 합니다. 특히, 김정일의 의전비서 전희정이랑 친분이 각별하다 해서 이번에 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이번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라는 각별한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요시다를 최대한 활용해서 반드시 김정일 위원장하고 통할 수 있는 루트를 찾아보세요. 목표는 남북정상회담입니다. 김대진과 김정일이 만나는 정상회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번엔 반드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진명훈은 통화를 끝내고 책상에서 일어나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왼쪽 10시 방향에 청와대 본관이 조그맣게 보였다.


‘과연 이 길로 가면 우리 태산이 살아날 수 있을까?’


그가 보기에 10년째 진전없는 대북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북한 당 간부들의 인식이었다.


사업 협의차 만난 당 간부 열에 아홉은 뒷돈을 요구했다. 이유도 황당했다. 우리 장군님이 남조선 인민들을 미 제국주의자로부터 지켜주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들의 상황 인식은 그러했다. 북한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핵심세력인 당 간부들이 대북사업이 잘 되면 북한이란 나라와 인민이 모두 잘 살게 될 거란 생각 자체가 없었다. 자신들의 생존과 출세에만 혈안일 뿐 그냥 자신들 방식대로, 기회만 되면 뜯어먹을 생각밖에 없었다.


반면, 인민들은 우리 민족 기질 그대로 온순하고 부지런하며, 무엇보다 똑똑했다. 이념보다 삶을 위해 움직였고, 스스로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시간. 그들에게 시간은 생존이었고, 자신에게는 강력한 자본이었다.

당 간부나 일반 인민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대북사업에 동참시킬 수 있을까? 오랜 세월을 공산주의식 배급 경제 세상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체제를 인식시키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일조일석에 해결하려 하기보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과연 시간이 충분할까?


그리고… 김정일. 북한의 가장 핵심적인, 결정적인 변수.


그가 체제 개방을 피할 수 없는 이 사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까? 39호실 같은 개인 비자금 채우는 외화벌이 수단이나, 남남 갈등 유발용 정치 수단으로 접근하면 대응할 방법이 있을까?


독재자의 속내는 깊은 안갯속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우리 정치권이었다. 이 사업을 갑론을박 정쟁으로 물들이며 동력을 잠식할 국회. 그리고 법적, 제도적 이유를 들먹이며 발목을 잡을 공무원. 이런 환경에서 5년 후 새 정권이 들어서면 이 사업이 지속될 수 있을까? 필요할 때는 손을 내밀고 악수하면서 돈을 뜯어가고, 필요 없다 생각되면 언제든지 냉혹하게 등을 돌려 공격해오는 정치 권력의 속성을 생각할 때… 과연 저들과 손발 맞춰 이 거대한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저기 저 파란 기와집에 있는 사람들,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저들을 믿을 수 있을까? 믿어도 될까?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는 정신적 버팀목인 아버지의 건강과 불확실한 사업 환경, 그리고 신뢰하기 힘든 남북한 세력들 사이에서 명훈은 자신이 가고 있는 이 여정을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이 길은 외길이었고, 자신은 이미 그 길 위에 돌아갈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진명훈은 문득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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