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화려한 출발, 부활의 서막?
1998년 6월 16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 코앞에 있는 남측 자유의 집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조명탑과 수십 대의 카메라 렌즈가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흰색 트럭 50대 차체에는 ‘진태양 명예회장 방북 소 운반 차량’이란 붉은 글씨와 큼직한 적십자 마크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고, 차량별로 소 10마리씩을 태운 채 줄지어 서 있었다.
KBC, MBS를 비롯한 국내 방송사들이 현장 생중계를 위해 모니터를 설치하고 복잡한 케이블을 바닥에 잔뜩 깔아놓아 어지러운 가운데, CNN, BBC 등 외신 기자들까지 모여들어 북새통이었다. 흥분과 희망, 그리고 묘한 역사적 긴장감으로 현장의 공기는 팽팽했다.
오전 10시, 진태양 명예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문산-판문점간 통일대교를 지나 임시로 설치된 공동경비구역내 단상의 마이크 앞에 서자 기자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찰칵, 찰칵, 차,차,차,차, 차찰칵.’ 수백개의 플래시가 동시에 터지는 소리가 흡사 기관총을 난사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때 그 소 1마리가 500마리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서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전달력은 강렬했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외신 기자들은 숨가쁜 속도로 기사를 타전하기 시작했다.
CNN을 비롯한 외신들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이 분단 이후 최초로 휴전선을 열었다고 일제히 대서특필했고,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극찬했으며, 영국 인디펜던트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핑퐁외교가 있었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엔 황소외교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진태양은 유엔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높이 5센티미터, 너비 50센티미터에 불과한 콘크리트 턱, 지난 수십년간 그토록 넘기 힘들었던 그 군사분계선(MDL)을 가볍게 넘었다. 북측 판문각 앞에는 송호경 아태위원회 부위원장이 분단 이후 한국 민간인 최초로 북한을 공식 방문하는 진태양을 영접나와 있었다.
진명훈은 약간 들떠있는 아버지의 옆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왕 회장이 북측 인사들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당하게 악수하는 모습에서, ‘드디어 태산그룹 부활의 서막이 힘차게 올랐다.’는 뿌듯함과 ‘대북 사업의 교두보가 확실히 확보되었다.’는 자신감이 벅차 올랐다.
‘요시다에게 들인 돈이 아깝지가 않아. 제법 능력이 있는 친구야.’
판문점을 출발한 진태양 일행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향했다.
50대의 트럭이 뿜어내는 매캐한 디젤 냄새와 먼지로 뒤덮힌 경의선 비포장 도로의 울퉁불퉁한 노면 상태는 상상을 초월했다. 남측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황무지 같은 풍경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시트 쿠션이 무색하게 허리와 목에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후 4시, 겨우 평양에 도착했다.
진명훈은 온몸이 욱신거리는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옆을 보았다. 왕 회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자세로 조용했다. 잠든 것인지, 아니면 애써 노쇠한 육신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초부터 아버지가 편안해하시는 김희규 태산건설 사장을 옆자리에 붙여 잘 챙기도록 지시했지만, 체력적인 한계까지 돌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평양 최고급 영빈관 백화원초대소에서 송호경 주최 만찬이 열렸다. 금박 장식의 넓고 화려한 연회장, 북측 당 고위간부들의 연이은 축배와 덕담이 이어졌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행사인데다 성공적 평가를 받아서인지 분위기는 비할데 없이 즐겁고 화기애애했다.
밤 9시가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북측 테이블에서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몇몇 고위 인사가 자리를 피해 연회장 바깥 복도로 나가더니, 긴장된 얼굴로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시선은 은밀하게 진태양 회장을 향했다.
잠시 후, 송호경이 김희규 사장을 불렀다. 송호경의 중간 키에 비쩍 마른 몸매가 김희규의 작달막하고 통통한 체격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김 사장,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진태양 명예회장님을 오늘 밤 원산 특각으로 모시라는 말씀이 계셨소. 내일 고향 통천에 편하게 가시도록 하라는 특별한 배려이시오.”
김 사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특별한 배려’라는 단어의 차가운 위압감을 읽었다. 그렇지만, 김 사장은 왕 회장이 저녁 9시면 잠자리에 들어 새벽 4시에 기상하는 오랜 습관이 있는 데다, 오늘의 일정이 고령의 신체에 상당한 무리를 유발할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송호경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사정을 했다.
“부위원장 동지, 명예회장님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이미 많이 피로한 상태이십니다. 그냥 평양에서 주무시도록 하면 안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송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김 사장, 위대하신 장군님의 배려를 거역하겠다는 말씀이신가?”
김 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역’이라는 단어가 북한에서 가지는 의미를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진명훈 회장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난감하네. 9시에는 주무셔야 한다고 했는데도 꼭 가야 한대요?”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랍니다. 타협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진명훈은 굳은 얼굴로 시계를 보았다. 9시 15분. 이것은 배려라기 보다 통제였다. 화를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탈 나시면 안되는데... 일단 김 사장이 옆자리에서 잘 챙겨드리세요.”
태산 일행은 다시 2시간이 넘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야 원산 특각에 도착했다. 왕 회장은 판문점, 개성, 평양을 거쳐오는 일정에 지쳐 원산으로 오는 내내 차에서 곯아 떨어졌다.
이번에도 송호경은 고령의 왕 회장 배려를 이유로 동행했다. 평소에는 양반처럼 점잖은 사람이지만, ‘장군님’이란 말 한마디에 차갑게 경직되는 송호경을 보며 명훈은 북한 사람들을 뼈 속까지 지배하는 김정일의 그림자가 새삼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뜻밖의 암초
왕 회장은 비몽사몽 상태에서 원산 특각으로 들어섰다. 진명훈은 송호경 일행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부랴부랴 왕 회장을 뒤따랐다. 김희규의 팔에 의지해 객실로 향하던 중, 왕 회장이 갑자기 어린 아이같은 말투로 칭얼거렸다.
“희규야, 여기 어디야? 나 힘들어. 집에 가고 싶어. 나 집에 갈래.”
그 순간, 김희규는 충격과 당혹감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바로 뒤따라오던 진명훈을 쳐다보았다. 진 회장은 이 상황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멍한 얼굴을 보였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안내원 두 명이 4-5미터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안내원들이 들을세라 손을 들어 김 사장에게 침착하라는 무언의 사인과 함께 서둘러 가자는 듯 왕 회장과 김희규의 등을 넌지시 밀었다. 김희규가 목소리를 낮춰 “회장님, 조금만 참으세요.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라고 달래가며 속히 객실로 들어갔다. 왕 회장은 눕자마자 이내 잠에 빠져 들었다.
잠시 후, 진명훈의 객실. 노크 소리와 함께 김희규가 들어왔다.
진명훈은 김희규와 마주 앉자마자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하게 ‘쉿’하는 신호를 준 뒤,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메모지에 적었다.
‘도청 조심’
김희규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훈은 다시 펜을 움직였다.
‘서울 귀국 즉시, 명예회장님 태산병원 입원. 외부 일체 차단. 보안 철저 유지.’
김 사장은 이 상황이 태산에 미칠 파장을 깨달은 듯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김 사장이 방을 나가자, 진 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산 일정이 아버님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구나’.
진태양이라는 거인이 침몰하는 것인가. 명훈에게 슬픔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과 태산의 회생이 오롯이 자신 하나의 어깨에 달려있다는 냉혹한 의무감이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하고 내리쳤다.
가끔 와인을 마실 때 피우던 쿠바산 시가의 강렬한 니코틴이 생각났다.
“지금 이럴 때 한 대 딱 피웠으면 좋겠구만.”
명훈은 니코틴의 유혹을 떨치려는 듯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바쁘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성과는 확실하게 챙겼다. 금강산 관광, 서해안 공단개발, 자동차 조립공장까지 합의했다. 명훈은 합의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1단계, 관광사업 개시.
2단계, 호텔, 스키장, 골프장, 공항 등 인프라 건설.
3단계, 국제회의장, 카지노, 면세점 사업.
최종단계, 저렴한 노동력에 기반한 서해안 공단 개발을 추진하고, 이 공단에 국내 중소기업 유치와 함께 태산자동차 조립공장을 설립
이것은 태산의 부활을 넘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경제 지도를 바꿀 그랜드 플랜의 출발점이었다.
원산 특각의 밤. 명훈은 아버지의 몰락과 거대한 제국의 원대한 미래라는 두 개의 짐을 짊어진 채,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