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우울증이야 우울감이야
나에게는 그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무슨 놈의 여자 변덕이 이리도 죽 끓듯할까?
일본생활 중에 겪었던 이런 싱숭생숭 한 마음의 병을 지금 또 한번 겪게 되다니.
그 당시 상황은 외국생활로 남편의 주재원 생활도 언제 고국 발령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치면 된다.
현재 나이도 들고 매사에 여유를 가지고 대응을 할 수 있는 위치인데 그렇지가 못하다.
얼마나 심적으로 힘이 드는지 책 한 줄 글자 한자 적기가 어려울지경이다. 오죽하면 브런치에 글쓰는 것도 2 주정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무생각도 할 수 없고 손가락 하나 까닥 하지 못하고 그냥 가만히 생리적현상으로 먹고 자고 센터에 나가서 앉아 있다 퇴근시간만 기다리다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외부 강의도 없어서 나갈 일이 없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큰 실수로 낭패를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는 지인들과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말이 꼬이며 자꾸만 지남력인 명사가 떠오르지 않아 " 그 곳이야 몰라 자꾸 묻지마, 생각이 안나" 정말 답답했다.
왜 나에게 이런 감기 같은 우울감인지 우울증인지 찾아 왔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바로 돈이었다. 돈이라는 놈이 이렇게 무서운 놈이구나. 옛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돈이 왠수다.
내용인즉 코로나 상황이전에 쬐그마한 상가를 하나 덜렁 구입한 게 지금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난 큰 욕심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큰 아들 녀석이 화근이었다. 어느 부모에게나 지 자식은 천재로 보인다고 평소 머리 굴리는 것을 보면 공부도 잘 할 것이라 생각을 했건만 잔 머리 굴리기와 공부머리는 따로라는 것을 큰 아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공부가 너무 쉬운치 않아 가방끈도 짧고 직장도 아닌 자영업을 하고 있다. 부모 욕심에 뭐라도 있으면 장가라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런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큰 아들도 "엄마 그 정도는 나와 함께 같아 나가요" 평소 신용도가 높은 편으로 80퍼센트 은행대출을 받아서 계획에도 없는 상가구입을 했다. " 센터운영과 강의 만 해도 대출금 갚아 나가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코로나 전까지 괜찮았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3년이상 지속되는 코로나 상황은 나와 큰 아들을 깊은 수렁으로 몰아갔다. 그래도 은행금리가 낮을 때는 고만 고만 했다. 얼마전 은행금리는 7퍼센트까지 육박했다.
아무리 올라도 3.6퍼센트 정도였다. 지금은 고객의 신용도에 따라 금리변동에 고정금리도 아니고 1년에 한번씩 변경 되므로 이건 사람의 피를 말린다. 그래도 다른 것을 아껴가며 연체 시키지 않고 꼬박 꼬박 내고 있다.
이런 사정을 두 녀석에게 말을 할 수 없다. 큰 녀석은 지 코가 석자라, 지 밥벌이도 겨우 하고 있는지 마는지 말을 안 하니 알 수 없고, 작은녀석은 자기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하며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단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늙은 영감(남편)에게 말을 해 보지만 지금이야 발톱빠진 호랑이라 큰 도움을 바랄 수 없다. 그래도 남편이 고맙다.
작은녀석의 추진력은 갑이다. 고등학교 중도 포기(자퇴), 대학교 재미없다고 한 학기 F학점, 군 입대 제대후 대학 조기 졸업, 대학원 중도 포기 그리고 회사원으로 지금은 이래 저래 자신의 미래를 두고 고민 중이란다.
이런 두 아들 녀석들을 보며 나 역시 한 동안 멘붕상태로 많이 힘들었다.
머리는 반백이 되어 정신없이 그냥 출근 하고 그냥 퇴근하고 멍청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다 아무생각 없이 집에 와서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로 아무거나 만들어 그냥 먹고 자고 유튜브 보며 2주일을 보냈다.
이제 다시 정신을 차려야겠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또 다른 반백을 한 늙은 여자가 나를 쳐다본다.
오늘은 염색을 했다. 입고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허물버듯 벗어놓은 여름 옷들을 손 세탁도 했다. 집에 세탁기가 없다. 큰 빨래는 세탁소에 보내고 가벼운 빨래는 내가 직접한다. 그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 . . .
그래 좀 긴 시간의 감기를 앓았다. 이제는 툴 툴 털고 일어나자. 은행 대출이자 갚아야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