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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Sep 25. 2023

74일차, 빨간 눈

16년째 만나고 있는 안과 원장님은 일이 재미있을까

일어났을 때 왼쪽 눈 흰자에 크고 새빨간 피가 맺혀 있었다. 이주 전쯤 같은 위치 같은 모양으로 충혈되어 있다가 삼사일쯤 지나 사라졌는데, 또 생긴 것이다. 이번에는 더 크고 색이 선명하다. 흡사 일본 애니메이션 <도쿄 구울>에 나오는 악귀 같다. 이제는 안과를 가야겠구나. 사실 나는 16년 전 라섹수술을 해서 매년 검진을 받아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망막박리의 위험이 커지므로 정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큰 일은 아니겠지, 마음을 다독이며 병원 가는 지하철을 탔다.


집에서 꽤나 멀기 때문에 이주 전에도 귀찮아서 안 갔던 안과병원. 열 번도 넘게 간 곳이지만 갈 때마다 지도를 검색해서 간다. 의도치 않게 '불친절'이라는 후기가 눈에 띄어 후기들을 읽어보았다. 친절하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공을 들여 세세하게 불쾌한 경험을 쓴 사람들도 두어 명 보였다. 진료가 귀찮은 듯 성의 없었다, 강압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수술 후 16년을 다니는 동안 불친절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병원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벽면에 붙어 있는 TV에서는 2000년대에 방영된 듯한 병원 원장님의 방송 출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화질도 좋지 않고 자막 글씨체도 굴림체다. 그러고보니 늘 방송 출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출연하지 않으시나. 16년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영상이겠지? 한번도 영상을 자세히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대기하는 동안 책을 읽으려고 킨들을 가져갔는데, 어수선해서 이어폰 없이는 책을 못 읽을 것 같아 포기하고 인스타그램만 의미 없이 뒤적거렸다. 한 시간을 조금 넘게 기다렸을 때 차례가 됐다.


안압 검사, 망막 촬영, 시력 검사를 모두 마치고 진료실 앞에 앉아 대기를 하는데 열린 문틈으로 컴퓨터 화면이 보였다. 아까 찍은 내 사진들일까. 다 보신 것 같은데 왜 안부르시지. 망막이 손상되었다거나 하는 끔찍한 소식을 전해야 해서 망설이시는 건 아닐까?! 그렇게 가슴 졸이며 약 2분이 지났을 때 호명이 되어 들어갔다.


차근차근 양쪽 눈 사진을 모두 열어 보여주고, 십여년 전의 사진도 꺼내 보여주며 신경과 망막 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눈에 핏줄이 터진 건 아마 건조해서 그럴 거라며 인공누액을 처방해주셨다. 최근 들어 새빨간 눈이 된 것 말고도 사소한 불편감이 있었던 부분(눈을 떴다 감을 때 가장자리에 밝은 빛이 보이는 증상)이, 혹시라도 예전에 주의하라고 했던 증상(갑자기 밝은 빛이 보이는 증상)은 아닌지 물어봤다. 괜찮다고 했다. 뭐가 계속해서 떠다니면 내원하라고 했던 것이며, 수술 후 시간 경과로 염려하는 것은 근시가 더욱 진행되면서 망막박리 또는 망막열공과 같은 심각한 상황을 수반하는 것인데, 내 경우 근시가 지난번보다 더 진행되지도 않았고 망막도 아무 문제 없으므로 괜찮다, 는 말을 조금 빠르게 했다. 괜찮다는데 계속 물어봐서 그런가. 아직도 대기중인 오전 환자들이 좀 더 있어 마음이 급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서너번 하고 안녕히 계세요, 하며 나왔다.


글을 쓰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빛이 번쩍이는 것은 광시증이요, 무언가가 떠다니는 것은 비문증이다. 두 증상이 함께 나타나면 망막박리나 망막열공을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광시증은 한번도 겪어본 일이 없어 조금 당황했지만, 지금 보니 그 자체로 심각한 질환은 아니긴 한가보다. 인공누액을 너무 자주 넣으면 안압이 높아진다고 들어 건조함이 느껴질 때만 넣으려고 했는데, 앞으로는 좀 더 신경써서 넣는게 좋으려나. 새삼스레 신체의 모든 기관이 귀중하게 느껴진다. 활자를 비롯한 형태와 색깔과 움직임을 계속해서 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0년대의 방송 영상을 벽에 틀어두지 않았더라면 떠오르지 않았을 의문. 병원 원장님에게 그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어떤 것들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요즘은 TV에 나오는 것처럼 떠들썩한 일이 없는 것이라면, 예전에 비해 덜 재미있을까? 혹시 재미가 덜해졌다면, 일에서 얻는 다른 의미와 성취감이 더 커졌을까? 어떤 것이든 만족스러우셨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매년 내 눈을 봐주실 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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