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티카 Stica Sep 26. 2023

75일차, 집중

위치가 바뀌어도, 매트 위는 온전하고 고요하다

새벽에 또 비가 내렸다. 택시를 탈 좋은 구실이구나, 한 십분 정도 더 꾸물거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한 시간 가까이 두 줄밖에 못썼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글이 마음에서 퐁퐁 샘솟는다고 했는데. 나는 글이 샘솟기는 커녕, 이미 써둔 것도 다시 지우고 있었다. 지우다 남는게 없을 것 같았을 때 비로소, 나중에 다시 고쳐쓰면 되지, 하고 빨간색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다섯시 삼십오분쯤 폼롤러 스트레칭을 대충 끝내고 UT택시를 불렀는데 응답하는 기사분이 아무도 없다. 콜을 취소하고 카카오택시로 불렀더니 바로 잡히긴 했지만, (우리 아파트가 워낙 작은 단지여서 그런지) 기사님이 정문을 못 찾으신다. 그래도 오래지 않아 탑승에 성공! 평소와 비슷하게 도착하겠구나 싶었지만 도착하니 다섯시 오십사분. 원래 가던 시간보다는 7분 정도 늦었다. 상관 없다. 일등하려고 일찍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늘상 매트를 까는 두번째 열 오른 편 구석 자리는 이른 시간에 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리가 아니다. 


요가원을 들어서자마자 벌써 서너명이 와서 시퀀스를 시작한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람. 비 오는 날은 보통 다른때보다 조용하고 사람이 적은데. 안으로 들어가니 심지어 두번째 열 오른 편 구석 자리(내 마음속에서 나 혼자에게만 내 자리였던 곳)에도 사람이 있다! 침착하자. 정해진 자리가 있는 요가수업은 없지 않은가. 이제까지 40회 수업을 하는 동안 예외없이 같은 자리에서 요가를 해온 것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일 뿐이다. 원래 하던 것처럼 내 호흡에 집중하면 괜찮을거야. 


그런데 '내 자리'에서 요가를 하는 그녀의 숨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그녀의 요가동작 하나하나가 너무도 가깝게 보여지고 느껴진다. 급기야는 기본 중에 기본, 아쉬탕가 101이라고 할 수 있는 수리야나마스카라 A를 틀렸다. 차투랑가(플랭크에서 내려가기) 후 업독, 다운독 호흡 5회를 해야 하는데 호흡 5회를 하지 않고 자세를 끝내버린 것이다. 망했구나. 객관적으로 여지없이 졸렬한 감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가 미웠다. 잘못한 수리야나마스카라 A를 처음부터 다시 하면서, 그녀를 미워하는 나를 그녀보다도 더 미워하고, 또 어떤 말도 안되는 실수를 할까 두려웠다. 


명상은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해준다고 했지. 이 순간 다 함께 수련을 하고 있다, 각자 자연스러운 숨을 쉬고 있다, 는 것을 기억하자. 


어느 동작부터였는지 더 이상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앞선 40회의 위치와 달랐던 오늘의 매트 위치, 그로 인해 180도 달라진 사위의 광경, 옆 자리 분홍색 매트 위의 수련생, 그녀의 숨소리와 동작. 내 매트 위에는 나 뿐이었다. 함께 호흡하면서도 혼자 호흡하는 개체로서.




10월 4일부터 10월 15일 명상 워크숍에 참가한다. 핸드폰은 물론이요 모든 전자기기를 소지할 수 없고, 나아가 읽기와 쓰기가 모두 금지된다. 요가를 포함한 모든 운동도 해서는 안되고, 산책만이 허용된다. 채식이나 저녁식사에 대한 제한 같은 것은 내게 있어 큰 불편이 아닐 것 같지만(울면서 후회할수도 있겠지만), 쓰기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명상에 성공하기까지의 매일을 기록할 수 있다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워크숍에 가더라도 명상의 경험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해보지 않았다. 누군가는 열흘을 커리큘럼대로 따르더라도 실패한 사람이 있었을텐데. 나는 운이 좋아 성공하기를 바라본다. 


집중아, 내게 오라. 집중의 상태를 소환하려는 욕망 자체가 명상의 지향점과는 거리가 먼 것이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74일차, 빨간 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