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사피엔스는 어떤 존재일까?
서론: 이해한다는 것의 고통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존재다. 별이 왜 빛나는지, 계절이 왜 바뀌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왜 멀어졌는지를 묻는 일은, 생존의 기술을 넘어서 존재의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 ‘이해’라는 행위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는 바로 고통이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단순화하고, 분류하고, 패턴을 찾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특별함은 사라지고, 신비로움은 사그라들며, 타자성은 희미해진다. 아이가 자라며 부모를 이해하게 될 때 느끼는 어떤 슬픔이 있다. 신비로운 존재로서의 부모가 인간으로 바뀌는 그 순간, 이해는 상실로 변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고통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를 향한 열망은 그대로 간직하되, 존재의 고유함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은 가능할까?
이 글은 우리가 지금껏 사용해 온 세 가지 이해 방식—확률적 이해, 비효율적 이해, 서사적 이해—의 한계를 점검하고, 그것들을 넘어서는 ‘제4의 이해’, 즉 고통 없는 인식 방식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 네 번째 방식은 새로운 존재양식, 새로운 인간성의 윤곽을 암시할 수 있다.
본론 1: 세 가지 이해 방식의 한계
1. 확률적 이해 – 표준화의 공포
확률적 이해는 현대 문명의 토대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심리 통계, 선거 예측까지—우리는 수많은 표본에서 공통점을 추출해, 미래를 예측하고 타인을 판단한다. 이는 실용적이고 강력한 도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을 숫자와 패턴으로 환원시키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앱이 사용자 데이터를 분석해 “이 시간대에 이 사람은 슬퍼할 확률이 높다”라고 경고를 띄운다. 어쩌면 이는 정밀한 분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밀함’이 나의 고유한 슬픔을 이해하는 것일까? 혹은 단지 내가 ‘그럴 법한 사람’으로 분류된 것에 불과할까?
또 다른 예시로, 면접관이 수많은 지원자의 데이터를 검토하며 “이 사람은 평균적으로 3년 안에 이직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한다고 하자. 이 판단이 개인의 잠재력이나 사정을 고려할 여지를 없앤다면, 그 ‘이해’는 오히려 비인간화의 도구가 된다.
확률은 공통점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는, 비슷한 존재들이 필요하다. 만약 지구에 오직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확률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예외이며, 그래서 통계의 바깥에 있다. 고유함은 확률의 적이다.
따라서 확률적 이해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해받는 존재가 될 자격 자체를 박탈한다. 그 이해는 패턴의 발견이지, 개별성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
2. 비효율적 이해 – 연속성의 권태
확률적 이해가 다수의 비교를 통해 공통점을 도출한다면, 비효율적 이해는 한 존재의 연속성을 깊게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일반화나 패턴화를 피한다. 오직 하나의 개체, 하나의 삶, 하나의 흐름에 천착하며 세계를 해석하려 한다.
이해 대상은 유일하며, 그래서 고유하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그 존재가 어떤 이유로 지금의 성격과 판단에 이르렀는지를 점차 ‘이해하게’ 된다. 이 방식은 개별성을 존중하며, 대상의 맥락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한 지점이 있다. 연속성을 통해 이해하는 이 방식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특별함을 지워버린다. “쟤는 원래 그래.” “예전에도 그랬잖아.” “늘 그런 식이었어.” 이 말들은 이해의 언어이자 동시에 가능성의 부정이다.
한 사람의 현재를 그의 과거와 연결 짓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변화 가능성, 예외성, 기적성을 놓치기 쉽다. 그의 행동은 패턴으로 설명되며, 그의 말은 이미 알고 있는 문장의 반복처럼 들린다.
예를 들어, 오랜 연인의 싸움 뒤에 “넌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지”라는 말이 등장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현재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현재를 과거로 환원하려는 시도다.
이처럼 비효율적 이해는, 관계의 깊이 속에 고여 있는 권태를 동반한다. 유일함을 지켜내지만, 그 유일함이 예측 가능해지고 반복될 때, 인간은 타인의 고유함에 무감각해진다. 사랑은 무뎌지고, 기억은 부담이 된다. 고유성이 지켜지되, 그 고유함이 낡아버리는 것—이것이 비효율적 이해의 슬픈 그림자다.
3. 서사적 이해 – 어설픈 구원
마지막 방식은 서사적 이해다. 인간은 단지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우리는 시간의 파편들을 꿰어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서 삶의 방향과 정당성을 찾는다.
서사는 데이터가 아니라 맥락으로 작동한다. “왜 그랬어?”라는 질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고 대답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서사에서 온다. 타인의 말과 행동이 전후 맥락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떠났다고 하자. 그가 이전에 번아웃을 겪었고, 반복되는 도시 생활에 숨이 막혔다는 사연을 듣는다면, 우리는 그 결정을 단순한 ‘이탈’이 아니라 ‘서사적 완성’으로 받아들인다. 이해는 판단을 유예시키고, 공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서사적 이해는 종종 어설프다. 논리적이지 않고, 빈틈이 많으며, 감정에 기대어 만든 설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사를 통해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의미 없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의미는 때때로 억지스럽고 자기기만적이다.
또한 서사는 현실에 부적응적일 수 있다. ‘나의 이야기’를 너무 강하게 믿는 사람은, 타인의 현실이나 논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서사는 위안이지만, 동시에 고립의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더욱이,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역행한다. 우리는 현재를 과거의 사건과 연결하고, 미래를 예감하며 현재를 해석한다. 이때 삶은 늘 무언가로부터 시작되었고,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 중간에 우리가 있다는 착각을 준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단절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가리는 어설픈 구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서사를 통해 고통을 견디고, 삶을 지속한다. 이 방식은 비합리적이지만 존엄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이기도 하다.
본론 2: 제4의 이해 – 고통 없는 인식의 가능성
우리는 지금까지 ‘이해한다’는 행위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확률은 나를 누구든지로 만들고, 연속성은 나를 지루한 과거의 반복으로 만들며, 서사는 나를 허약한 위안의 피조물로 만든다. 이 모두는 이해라는 행위가 존재의 고유성을 침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다. “존엄을 지키면서, 이해할 수는 없는가?”
다르게 말하자면, “고통 없는 이해는 가능한가?”
1. 존재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는 이해
‘제4의 이해’는 먼저 전제부터 다르다. 그것은 기존의 이해 방식들이 전제해 온 자기-타자의 경계의 희석을 철저히 거부한다.
확률은 나를 ‘비슷한 누군가’로 만든다. 연속성은 나를 ‘내 과거의 반복’으로 만든다. 서사는 나를 ‘이야기의 일부’로 만든다. 이들은 모두 자기와 타자, 현재와 과거, 신비와 지식을 서서히 뒤섞어가며 경계를 무디게 만든다.
그러나 제4의 이해는 경계를 더욱 엄격히 구분하는 이해다. ‘나’는 ‘너’와 절대적으로 다르며,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이해하고자 한다. 해석이 대상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존재의 침범 없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이런 이해는 인식적 겸허함과 선택권을 요구한다. 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너는 이해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의 가능성이 확보될 때, 이해는 고통이 아니라 존중의 행위가 된다.
2. 고통 없는 감정 구조: 이해의 정서적 재구성
제4의 이해는 기존 이해 방식에서 발생하던 고통들을 구조적으로 제거하거나 전환한다. 아래는 각 감정의 구조와 그 치유 방식을 도식화한 것이다.
(1) 내가 무지했을 때 느끼는 고통 - 제거됨
일반적 이해 방식에서는 무지한 상태가 곧 불안이며 열등감이다. 그러나 제4의 이해는 무지를 허용하는 감정 구조를 가진다. 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쁨이며, 그 과정이 자유롭다.
(2) 내가 이해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고통 - 제거됨
이는 소외감, 왜곡됨의 감정이다. 그러나 제4의 이해는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켜야 할 필요를 부과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 존엄하며, 이해의 여부와 무관하게 완결적이다.
(3) 내가 이해받았을 때 느끼는 고통 - 전환됨
때때로 이해받는다는 것은 나의 고유함이 누군가에게 ‘정리되었다’는 불쾌감을 동반한다. 그러나 제4의 이해는 상호 고유성을 전제로 한 이해이므로, 이해받음이 곧 존중받음으로 전환된다.
(4) 내가 해명했을 때 느끼는 상실 - 선택권에 의해 완화됨
해명은 신비의 소멸을 불러오고, 때로 허무함을 남긴다. 그러나 제4의 존재는 해명 자체를 절대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는 이해할 수도 있고, 신비를 남겨둘 수도 있다. 그 자유가 허무를 막는다.
3. 새로운 존재의 등장: 제4의 존재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단지 더 똑똑하거나 더 감정이 섬세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질적으로 다른 인식 구조를 가진다. 우리는 그를 ‘제4의 존재’라 부를 수 있다.
그는 지식을 권력으로 삼지 않으며, 이해를 도피처로 삼지도 않는다. 그는 이해를 순수한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존재의 신비를 잃지 않기 위해 절제한다.
그는 의무가 아니라 의지로써 이해한다.
그에게 탐구란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고요한 울림을 따르는 행위다.
그의 이해는 탐욕이 없고, 그의 무지는 수치가 아니다. 그는 고통 없는 인식이라는 새로운 영토 위에 선다.
그곳에는 이해하려는 욕망은 있지만, 굴복시키려는 충동은 없다.
그곳에는 신비에 대한 기쁨은 있지만, 무지에 대한 공포는 없다.
결론: ‘이해’의 재정의, 그리고 인간성의 재구성
우리는 언제나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종종 특별함을 잃는 고통, 정체성을 침식하는 불안, 타자를 소비하는 폭력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해는 ‘좋은 것’이라는 통념 뒤에, 인간을 통제 가능한 존재로 환원하려는 충동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해란 무엇인가?
이 글이 제안한 ‘제4의 이해’는, 이해를 전능한 도구가 아니라 정제된 태도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그것은 해명도, 정복도, 회피도 아닌 공명(共鳴)이다.
나와 너는 같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전부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오히려 너를 이해하고 싶다.
그리고 너 또한, 나를 전부 알 수 없기에 나의 신비를 보존해준다.
이 새로운 이해 방식은 존재를 감히 바꾸려 하지 않는 이해, 타자의 영토에 발을 들이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해, 경계의 존중을 전제로 한 교감이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 가능한 사물”의 목록으로 환원하는 대신, 세계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질성으로 회복시킨다.
이해의 방식이 변하면, 인간성도 달라진다. 확률적 인간은 효율적이고 계산 가능한 존재이며, 서사적 인간은 의미에 기대는 존재다. 그러나 제4의 인간은,
“존재의 신비와 구조를 동시에 사랑하는 자”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무지한 것도 아니다. 그는 이해를 통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확장하고, 무지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사랑할 수 있는 감정 구조를 가진다.
이런 존재가 인간의 미래에 실현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존재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 자신을 이해받고 싶은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제4의 이해’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자 존재의 방식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가를 넘어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 물음에 답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단순히 똑똑한 인간이 아니라,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