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일반인의 눈으로 본 존재(하이데거)
“존재한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쉬워 보인다. 뭔가가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누군가 “존재가 뭔데?” 하고 묻는 순간, 말이 막힌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뭔가가 있다는 걸 느낄 줄은 안다. 빨간 장미가 있고, 책상이 있고, 옆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정말 뭐가 존재하는 걸까?” 장미를 빨갛게 보이게 만드는 빛의 파장이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그 장미를 인식하는 내 뇌의 활동이 존재하는 걸까? 혹은 이 모든 게 다?
무엇이 맞든, 분명한 건 하나다. 존재는 우리가 설명하지 못해도 어디엔가 있다는 것이다.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없을 수는 없다. 있어야 존재니까. 그런 점에서 비유하자면 존재는 ‘시작점’이다. 빨간 장미의 시작점. 장미를 빨갛게 보이게 만드는 빛의 파장의 시작점. 내 뇌의 활동의 시작점. 그런데 우리는 빨간 장미도, 빛의 파장도, 뇌도 안다. 하지만 존재는 모른다. 이처럼 존재는 있지만 설명되지 않는 묘한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은 주로 물건을 붙잡고 존재를 따졌다. 고무망치를 예로 들어보자. 철학자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고무를 떼면 여전히 고무망치인가?”, “망치로 못을 박을 수는 있지만, 생긴 게 바뀌었으면 여전히 고무망치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고무망치가 있다는 걸 모르면, 그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나?” 이처럼 존재는 ‘고무망치’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고민돼 왔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설령 우리가 고무망치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고, 감각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곧 존재를 이해한 건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존재는 있지만 감각되지 않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감각 안의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감각으로 정의하려 드는 건 어리석을지 모른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시선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이를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자면, 즉 하이데거는 존재자(감각 가능한 것, 고무망치)를 분석하는 것으로는, 존재(감각 가능한 것의 시작점, 고무망치의 시작점, 고무망치의 드러남의 방식)의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한번 고무망치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이 고무망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봐보자.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고무망치가 위험한 물건이다. 그래서 선반 위에 올려둔다. 목수에겐 공구 주머니 속 필수 도구다. 반면,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아랫집 사람에겐 복수의 무기일 수 있다. 똑같은 망치인데, 쓰는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존재를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 걸까? 고무망치라는 물리적 실체에서일까, 아니면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해석’에서일까? 하이데거는 후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그는 고무망치를 사람이 그것을 맥락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때, 비로소 ‘존재’가 드러난다고 봤다. 예컨대, 아이를 둔 부모가 고무망치를 선반 위로 치워 두는 그 순간, “아이 손에 닿지 않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발생한다. 이 판단 속 의미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일부다. 단지 고무망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여겨지고 ‘무엇으로’ 쓰이는지에 따라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사람과 세계가 만나는 그 지점”으로 봤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존재는 어떤 사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나느냐의 문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어떤 공간에서,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드러나는 구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장소’에 비유한다. 당장은 존재가 장소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만약 존재를 시작점으로 본다면, 시작하는 장소가 존재이다. 운동장 없이 달리기를 시작할 수 없다. 달리기 선수 이전에 그 운동장이 있다. 따라서 어쩌면 진짜 ‘시작’이란, 시작할 수 있는 자리, 그 기반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를 ‘가능성의 장’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탁월하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의미, 존재자란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나에게 편한 언어를 사용한 표현과 정밀한 표현 두 가지를 모두 제시했다.
존재라는 사건의 가능성 속에서 의미라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의미가 존재자라는 그릇에 담겨 인간에게 감각된다.
존재란 세계가 드러날 수 있는 열림이며, 그 안에서 의미가 발생하고, 의미는 존재자를 통해 현존재에게 드러난다.
위를 풀어서 말하면 이렇다. 의미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는 방식이고, 존재자는 그 이해가 드러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다. 고무망치는 그저 망치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다. 존재는 단순히 눈 앞에 있음이 아니라, 보이는 방식이고, 느껴지는 의미의 열림이다. 이처럼 고무망치 하나만 봐도, 존재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익숙한 고무망치로부터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존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철학이라는 낯설지만 어쩐지 익숙한 세계에 서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