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도덕이라는 단어는 익숙하면서도 낡아 보인다. 어릴 적엔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말로, 어른이 되면 “그건 옳은 일이니까”라는 당위로 되풀이된다.
하지만 누군가 “왜?”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흔히 말문이 막힌다. 도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단순하면서도 불편한 질문을 안고, 나는 철학자 칸트를 찾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길을 좀 잃었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예상보다 훨씬 단호하다. 그는 도덕 판단에서 감정이나 결과를 기준으로 삼는 것을 철저히 경계한다. 그가 보는 도덕의 핵심은 행위의 외형이나 결과가 아니라, 그 선택을 이끈 의지의 순수성에 있다. 다소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만큼 명료하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길에서 지갑을 주웠고, 주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하자. 만약 그 순간 “사람들이 날 착하게 보겠지”라는 기대가 스쳤다면, 칸트에게 이 행위는 도덕적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반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건 옳은 일이니까”라는 생각만으로 지갑을 돌려주었다면, 그때 비로소 도덕이 성립한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의 문제이며, 그 동기는 타인도 아니고 상황도 아닌, 오직 나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조건이 제기된다. 그 선택이 정말 자발적인 것이었는가? 외부의 강요나 압박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한 결과였는가? 칸트는 말한다. “도덕적 책임이 성립하려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책임은 오직 자유롭게 선택한 자에게만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도덕과 자유는 하나로 묶인다. 여기서 자율이란 곧 자기 자신에게 법을 부여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한다. 칸트에게 주인이 만든 법만을 지키는 노예는 도덕적일 수 없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고자 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형이상학이 아니다. 도덕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논리적 필연이다. “도덕적으로 살고 싶다면, 자유를 전제하라.”
여기서 답답함이 발생했다. 나는 단지 ‘왜 윤리가 중요한가?’를 물었다. 그런데 칸트는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물자체라는 미지의 영역에 두고 ‘모른다’로 규정했으며, 그는 ‘왜 도덕이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도덕이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를 분석했다. 이 구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화가 많이 났다. 대뜸 옳은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맞춤 논리를 전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오해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왜 도덕이 중요한가?”라는 말은 타인에게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도덕 구조를 구성할 자격을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행위라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칸트에게 답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질문을 통해 윤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유의 주체로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꿨다. “나는 어떤 도덕을 세워야 하는가?”
그 시점에서, 도덕은 철학적 담론만이 아니었다. 내 사고과정의 한 축이 되는 현실이었다. 나는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의 단서를 뇌과학의 연구 성과에서 얻을 수 있었다. 현대 신경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윤리적 자아를 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뇌에는 ‘자아 연결망(self-related network)’이라는 회로가 있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를 생각할 때 이 회로가 활성화된다. 이 구조는 자기 인식뿐 아니라, 의미, 가치, 윤리적 지향까지 관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회로가 타인을 떠올릴 때도 반응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 중요한 관계일수록 더 그렇다. 부모, 친구, 연인, 선생 혹은 영화 속 인물까지 그들과의 연결 속에서 우리는 자극받고, 자아를 재구성 한다. 존경하는 이가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단순한 칭찬을 넘어 정체성의 거울을 맑게 닦아준다. 반대로, 가까운 이의 냉소는 그 거울에 균열을 남기기도 한다.
이런 연구 결과는 도덕이 단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규칙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려는 본능적 경향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 과감하게 표현하자면, 도덕이 관계 속에서 자기 인식을 바람직하게 조정하는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의 자아는 타인의 기대, 평가, 실망 속에서 끊임없이 반응하고 변화한다. 그 점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정하는 도덕은 실천의 요청이자, 자아의 건강을 위한 조건이다. 하지만 여기서 만약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접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을 그런 존재로 보기 시작한다. 나는 남을 계산적으로 대하는 사람이고, 세상도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있다고 여긴다. 나도 결국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이해타산적 자아 구조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다. 진짜 좋은 도덕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은 단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아의 구조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실천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선택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 행복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칸트가 말한 ‘의지의 순수성’이라는 관점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그것은 도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은 순수한 의지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도덕을 행복한 자아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도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도덕을 자율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 칸트는 도덕에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도덕의 위상을 낮추는 태도가 더 큰 자유를 가능케 한다고 믿는다. 도덕을 신성한 계율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날 답답하고 화나게 한 강요가 아닌, 자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실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칸트의 정언 명령과도 겹친다(본질은 다르지만).
물론, 이것은 나의 사유가 도달한 하나의 결론이다. 당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모든 사유가 자유로운 탐색이었다는 점이다. 그 탐색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도덕은, 타인의 명령이 아닌 나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그리고 그런 도덕만이, 비로소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