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유명해지고 싶은 진짜 이유

우리는 성공이 아니라 정체성을 원한다.

by 하루찌

지금 성공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경로는 무엇일까?

바로 유명해지면 된다.


우리는 유명한 사람을 가리켜 성공한 삶이라고 부른다.

“성공했어”와 같은 평가는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르디외는 유명세를 ‘상징자본’이라고 불렀다.

신기하게도 이 자본은 현금보다 더 현금이다.

즉 사람들은 돈보다

“인정”을 먼저 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은

사회에서 권력처럼 작동한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남들 모르게 묵묵히 일하는 사람을 가리켜,

성공했다고 떠받들지는 않는다.

그건 과거 은둔형 장인 같은 이야기다.

먼지 쌓인 구닥다리 책에서나 나올법한 말이다.


성공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확실한 경로가 바로 유명세이다.


현대 플랫폼 경제에 있어.

사람들의 관심(주의, attention)은 곧 “생산수단”이다.

현대에는,

유명인이 곧

자본가라는 그런 말이다.

공장도 토지도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

그걸 소유하면 자본가,

반대로 시선을 바치는 사람은 노동자가 된다.


관심에 관해서는 사람들의 반응도 확실하다.

당장 오늘 월급이 오르지는 않더라도,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는 ‘코인’이다.

요즘 시대에는 앞으로의 보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은 실력이 비슷해도, 심지어 똥을 싸더라도

박수를 치고

더 비싼 값을 받고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더 쉽게 신뢰를 얻는다는 연구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유명세는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선망받는 가치이자,

이미 유명한 이들에게는 확실한 진통제이자 자기를 붙드는 기둥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말은

유명세가 왜 필요한지이지,

왜 우리는 유명세를 쫓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유명세가 왜 그렇게 강력한지 알려면,

삶에서 그것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도 봐야 한다.

그리고 삶은 몸에 있다.




몸은 우리의 역사다.


우리 몸은 기억한다.

우리는 각자의 메커니즘을 가진다.


같은 일에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는

특별한 의식적인 개입이 없다면

인간은 각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좀 심각한 예를 들자면,

트라우마도 “기억”보다

신체 반응(자율신경계) 차원에서 더 크게 남는다.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어떤 사람은 즉시 변명부터 늘어놓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웅크러든다.

전자는 어린 시절 실수할 때마다 혼났던 기억이,

후자는 눈에 띄지 않아야 안전했던 경험이 몸에 남아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겪은 사람이 있다.

사고 자체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급브레이크 소리만 들으면 손에 땀이 난다.

뇌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한다.


어릴 때 부모님이 자주 싸웠던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면 심장이 먼저 쿵쾅거린다.

머리로는 “별일 아니야”라고 생각해도 몸이 먼저 얼어붙는다.

반면 시끌벅적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이 “몸의 기억”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햇볕에 말린 이불 냄새에 갑자기 마음이 놓이는 것도,

오래전 연인이 쓰던 향수 냄새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도

모두 같은 원리다.


우리 몸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삶 전체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몸을 살아간다.


이건 중요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우리는 몸을 살아간다.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고

느낀만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낀다고 다가 아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라는 문제도 남아있다.


이걸 고상하게 ‘해석’ 내지 ‘편집’ 내지 ‘서사’라고 한다.


여기 일관된 해석으로 자신을 세우는 사례가 있다.


같은 이별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만든다.

둘 다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그 고통을 어떤 서사에 넣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달라진다.


실패를 반복하는 사업가가 있다.

그는 매번 “나는 결국 해내는 사람”이라는 줄거리 안에 실패를 배치한다.

그에게 실패는 성공 서사의 복선이다.

반면 똑같은 실패를 겪고 “역시 나는 안 돼”라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에게

실패는 결말의 확인이 된다.


여기 서사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


기억이 뚝뚝 끊기는 해리성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보통 하루를 하나의 흐름으로 산다.

아침에 일어난 내가 점심을 먹고,

저녁에 잠드는 것도 같은 ‘나’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건 뇌가 끊임없이 경험을 이어붙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리는 그 이어붙이기가 끊어지는 현상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데

어제가 기억나지 않는다.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다.

거울 속 얼굴이 나인 건 아는데,

느낌이 없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을 조종하는 것 같다.


가끔 시간이 점프한다.

분명 오후 2시였는데

정신 차리니 저녁 7시다.

그 사이에 뭘 했는지 모른다.


그냥 그렇게 산다.

매일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빈 칸을 추측하면서.


물론 흔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서사가 끊어진 인간은 어떤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에게는 ‘나’라는 이야기의 저자가 여럿이거나,

때로는 아예 부재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연결되지 않는다.

기억은 조각나고,

감정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일관된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없으니 다음 장을 쓸 수도 없다.

그래서 불안하다.

나라는 책의 저자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매 순간을 산다는 것,

그것이 해리의 공포다.


결국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흩어진 몸의 경험들을 하나의 줄거리로 꿰맸다는 뜻이다.


그 서사가 정확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저자라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무너질 때,

사람은 고통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흔들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우리에게 느끼는 몸이 있고,

그 몸을 엮어 만든 서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사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생각보다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유명해지고 싶어한다.

유명세는 내 안의 흔들리는 몸들을

타인의 시선으로 억지로라도 하나로 묶어주는 서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서사를 만드는 기준은 주로 과거에 있어 왔다.




영화로 보는 서사의 지연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전쟁영화가 쏟아졌다.

전쟁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조폭영화가 유행했다.

<친구>, <달콤한 인생>.

의리, 배신, 서열.

갑자기 모든 게 무너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규칙이 명확한 세계를 갈망했는지 모른다.


2000년대 고성장이 끝나고 나서야

<국제시장>이나 <미나리> 같은 영화가 나왔다.

가족의 희생, 묵묵한 헌신.


정작 그렇게 살았던 시대는 지났는데,

그 서사는 뒤늦게 도착했다.

우리는 항상 지금을 살면서

과거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꿰맨다.


일상에서의 지연


부모님 세대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과거 서사로 지금의 번아웃을 설명하려 한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것처럼.


연애가 끝났을 때 흔히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서사를 꺼내든다.

그 서사는 관계란 노력하면 유지되는 것이라는

과거의 믿음에서 온 것이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살아가는 내 몸과 이어붙인 이야기가 다르다는 거다.


회사에서 억지로 시킨 회식을 거절했다.

몸은 알았다.

이건 내 에너지를 지키는 일이라고.

그런데 과거 서사는 “나는 팀워크를 해치는 사람”이라고 쓴다.

그리고 죄책감을 현재의 몸으로 느낀다.


그 서사의 기준은 어디서 왔을까.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게 미덕이던 시절,

그 시절의 잣대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다.

몸은 이미 지쳐 있었고, 거절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서사는 “나는 의리 없는 사람”이라고 적는다.

의리라는 단어 자체가 공동체가 생존의 단위였던 시절의 유산이다.

지금 나는 혼자서도 살 수 있는 세상에 사는데,

판단 기준은 여전히 마을 단위로 살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사회는 사건을 바로 서사화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서야, 즉 이제 숨돌릴만 했을 때 이야기를 만든다(halbwachs 등).


문화는 항상 늦게 도착한다.
- 프레드릭 제임슨


몸은 2025년을 살고 있는데,

서사는 1985년의 잣대를 들이민다.

바로 그 간극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불필요하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크게 이상하거나,

마조히스트라서가 아니다.


실제로 예측처리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기 보다는,

“과거를 기준으로 예측한 모델”로 경험한다.

즉 우리의 몸은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과거에서 정해진 서사를 살아가고,

또 그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사람은 안 바뀐다. 저 놈은 저번에도 그랬으니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 말에 끄덕거리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전을 주려 한다.

오늘날에는 위의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다 잊어도 좋다.


미안하다.

아래 내용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과거의 권위가 해체된 시대


이제는 사회 변화가 빠르고 예측이 불가능해졌다.

부모님이 살았던 방식은 참고서가 되지 못한다.

10년 전의 조언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

과거라는 기준점이 사라졌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과거의 권위를 해체했다.


모든 것이 불안하다.

느껴왔고 지금도 느끼는 몸은 있는데,

이를 하나로 엮어 ‘나’를 만들 수가 없다.

과거에 기댈 수 없으니 서사의 재료가 없다.


스스로 붕괴되고

모든 게 불확실하고

근원적인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래서 우리 세대들은 미래를 준비한다.

과하게.


스물셋에 벌써 세 번째 자격증을 딴다.

쓸지 안 쓸지 모른다.

일단 딴다.

대학생인데 대학원 준비, 취업 준비, 공무원 준비를 동시에 한다

뭐가 될지 모르니까 다 열어둔다.

퇴사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직 플랫폼에 이력서를 올려둔다.

혹시 모르니까.

항상 플랜 B를 준비하는 자신으로 산다.


운동, 식단, 루틴, 자기계발.

뭔가를 꾸준히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나’가 된다.


할 수 있다라는 명령은 무한한 가능성과 긍정성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책임과 자기 착취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 피로사회, 한병철


과거를 버린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는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미래에 도래할 가능성을

서사를 엮는 기준으로 써먹고 있는 것이다.


과거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현재를 정의한다.

이 상황에서 실행과 결과는 미뤄진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실행해서 결과가 나오면 ‘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격증을 따서 취업했다.

끝.

그럼 이제 뭘로 나를 설명하지?

책을 끝까지 써서 출간했다.

반응이 없다.

‘언젠가 작가가 될 나’는 사라지고 ‘실패한 나’만 남는다.

고백했다.

차였다.

‘가능성 있는 관계’는 ‘끝난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준비만 한다.

면접을 앞둔 사람처럼 영원히 대기실에 앉아 있는다.

무대에 올라가면 끝나버리니까.

가능성이라는 서사가 무너지니까.

결과가 나오는 순간 근원적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든다.


모든 게 유동적이라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준비 중인 상태’를 안전하다고 느낀다.
- 액체근대(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


근원적 불안을 가리는 건,

비단 미래에만 있지 않다.

미래를 서사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처음에 말한 유명세를 동원할 수 있다.

아니, 애초에 대부분의 우리가

유명세에 도전할 만큼 용기있지 않아서,

혹은 유명세를 타기엔 너무나 평범해서

미래에 기댈지도 모른다.


유명세는 결국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를 고정시키는 장치다.

서사가 무너진 시대에,

남들이 붙여주는 이름은

미래와 함께

가장 쉬운 정체성이 된다.

불안을 가리는 방패막이 된다.


유명하고 성공해도 불안하지 않냐는 말이 있다.

오히려 더 불안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유명세가 없어 성공하지 못할까 불안해하고,

무시당할까 불안해하고,

버려질까 두려워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최선이 되지 못할까

슬퍼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중론이다.


이처럼, 오늘날에 있어

준비하는 삶은 안전하다.

아직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유명한 삶은 짜릿하다.

성공과 쾌락을 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아직 살지도 않았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게 아니다.


앞에서 몸이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데 몸은 기억만 하는 게 아니다.

몸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진짜인지도 안다.

유명세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고정하려는 시도이고,

끝없는 준비는 미래로 나를 유예하려는 시도다.

둘 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덮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몸이 보내는 신호를 덮지 않으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냥 불안하면, 불안을 느끼자고 제안하고 싶다.


몸소 불안을 느끼자고 말하는 것이다.

몸을 떨고 심장이 쿵쾅댐을 느끼고 손에 땀이 고이는 바로 그걸 겪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불안이 올라올 때 대부분은 휴대폰을 꺼내거나,

유튜브를 틀거나, 괜찮다고 중얼거린다.

그 대신 한 가지만 해보자는 거다.

가만히 앉아서

그 불안이 몸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

가슴이 조이는지,

목이 막히는지,

배가 싸한지.

찾았으면 거기에 손을 얹고 30초만 버티는 것.

아무것도 안 하고.

해석하지 말고.

묻지 말고.

그냥 그 감각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아채기만 하는 것이다.


이건 위로가 아니다.

불안이라는 복권을 긁는 행위다.


불안은 진짜 현실을 드러낸다.
- 하이데거


일요일 저녁이 공포였던 사람이 있다.

월요일이 오기 전에 뭔가를 준비해야 할 것 같고,

준비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아서

자기개발 영상을 틀어 놓고 보지도 않으면서

준비하고 있다는 감각을 유지했다.

그게 그 사람의 매주 일요일 저녁이었다.

어느 일요일, 불안이 올라왔을 때

그냥 앉아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고 손이 차가웠다.

5분쯤 지나자 답답함이 조금 풀렸고,

이상하게도 산책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그냥 걷고 싶다”는,

몸의 신호였다.

무언가 되려는 ‘나’가 아니고

지금 당장에 서서 갈망하는 ‘나’가 나타난 것이다.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다.

불안을 30초 견뎠더니,

덮여 있던 진짜 감정과 욕구가 올라온 것뿐이다.

서사의 시계는 이렇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정반대다.

노력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자기계발을 하지 말라고도,

유명해지지 말라고도 한 적이 없다.

중요한 건 순서다.

불안을 덮고 달리는 사람은

빠른 게 아니라 방향이 없는 거다.

자격증을 왜 따는지 모르고,

콘텐츠를 매일 올려도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른다.


바쁘다.

열심히다.

그런데 멈추면 무너진다.


반대로 불안을 견딘 사람은 이상한 일을 경험한다.

몸이 원하는 걸 알려준다.

“이건 하기 싫다”가 선명해지고,

“이건 해보고 싶다”가 올라온다.

무엇이 자연이고,

무엇이 도전인지가 선명해진다.

그때 움직이면 같은 노력인데 마찰이 준다.

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몸이 따라오니까.

오히려 일이 된다.


그때 만드는 서사는

몸을 배신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안을 안 느끼고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운이 좋았거나,

아니면 나중에 대가를 치를 것이다.


불안한 건 약해서가 아니다.

멘탈 관리를 실패해서도 아니다.

멀리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세대가 겪는 불안이 분명 기회라고 생각한다.

불안은 병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사는지

몸소 느끼게 하고

결국에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드러내게 하는 기회다.


불안하기에 억지 정체성을 가지려 한다면

불안하기에 실행을 미룬다면

불안하기에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면

불안하기에 타인의 시선에 기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현재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견디게 될 때에,

우리의 멈췄던 서사의 시계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벌써 20대야, 30대야. 40대야. 50대…”

“진짜 ‘나’가 뭔지 모르겠다.”

“뭔가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휴일이 좋은데 막상 쉬면 힘들다.”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고,

“나는 과거에 있었고 이런 길을 거쳐 지금에 왔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불안을 회피하려 정체성을 만들면

정체성은 나를 살리기는 커녕

나를 멈추게 만든다.


불안을 피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간만 흐른다.

그리고 그게 문제다.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은,

인간에게 있어

쇠락을 의미한다.


불안을 견디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인생의 재생버튼을 다시 누르는 최소 조건이다.

그 버튼은 머리가 아니라 몸에 있다.

아무 것도 안하고 몸에 손을 얹는 것,

그게 버튼을 누르는 동작이다.


우리는 불안을 없애려는 세대가 아니라,

불안을 덮으려는 세대다.

이제는 그 카펫 밑에 코끼리를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한 거짓말을 고백하고 글을 끝내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유명해지고 싶은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다.

성공 때문도 아니다.

불안을 잠재우는 확실한 서사를 사고 싶기 때문이다.


유명세는 상징자본이면서 동시에

과거가 사라진 이 시대에 아주 강력히 기능하는

불안을 마취하는 진통제다.


하지만 진통제는 통증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통증이 있는 진짜 삶을 잃게 만든다.

유명세도 마찬가지다.

매거진의 이전글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