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점 부끄럼 없이
환자분이 입원한 지 3주가 지나도록 망상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본인의 계좌에 돈이 전혀 없다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병원비를 감당할 수가 없다며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 자체를 불안해했습니다. 신경안정제가 들어 있는 주사를 드리면 잠시 안정을 취하긴 했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불안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환자는 저와 보호자가 뒤에서 짜고 쳐서 환자를 내보내주지 않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주제의 편집증적 사고(paranoid idea) 또는 편집증적 망상(paranoid delusion)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가 환자가 보호자와 통화를 했냐고 물었는데, 저는 통화하지 않았다고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상태가 나아지질 않자 교수님이 약을 바꾸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약을 바꾸어도 환자의 망상과 불안은 금방 호전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약물의 부작용인지 안절부절못한 증상이 늘었습니다. 항정신병제 중에는 좌불안석(akathisia) 부작용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원래 가지고 있던 불안도가 높은 환자는 안절부절못한 것이 병의 증상 때문인지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집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환자에게 곧이곧대로 알렸습니다. 그러자 환자분은 필요도 없는 약을 억지로 먹는데 심지어 약의 부작용이 생겼다고 하니까 약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좌불안석이라는 증상에 집착(preoccupation)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를 알린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렇게 불안도가 높고 의심이 많은 환자분에게 굳이 왜 알렸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문제를 숨기기보다는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환자와의 신뢰관계(rapport) 형성에 도움이 되었던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까지 환자분은 하루 종일 망상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면담을 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는 못하고 망상과 관련된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좌불안석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자, 대화 주제가 망상에서 좌불안석으로 옮겨졌습니다. 물론 망상이 없어지거나 불안도가 낮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결할 수 없는 허구의 망상에 대해 걱정하는 것에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로 걱정이 옮겨진 것입니다.
좌불안석은 항정신병제 용량을 줄이고, propranolol이라는 약물을 추가해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환자분과 저의 신뢰 관계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환자분은 병동에서 불안할 때 저를 찾기 시작했고, 본인이 불안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저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치프 선생님은 이를 듣고 좋은 징조라며 환자가 본인의 증상을 인지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경감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환자분의 불안도는 점차 낮아지고, 점차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사실은 약을 바꾸고 약효가 들기 시작해서 좋아진 것 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망상에 빠져 불안감에 잠식되어 있던 환자분이 저에게 마음을 열고, 증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저에게 이렇게 의심이 많은 환자일수록 환자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며 환자분에게는 스스로 한점 부끄럼조차 없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전까지는 교수님의 눈치만 보며 혼나지 않으려고만 했다면, 그때는 교수님에게 진정한 가르침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단 환자를 대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하나 얻었다고 느꼈습니다.
에피소드 마치며 시 한편 올립니다^^
<솔직함>
당신은 그 사람에게 한점 부끄럼 없을 수 있나요
그 사람에게 한 없이 솔직할 수 있나요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그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일 것입니다
당신은 그 사람 앞에서는 한 없이 부끄러운 가요
그 사람은 당신에게 솔직한 마음일까요
그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기고선
더 이상 두렵지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는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마지막에 제가 느끼고 배운 점들만 실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