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가장 길었던 밤

by 김혜진

가게가 동네의 사랑방이 된 것은 단순히 물건을 팔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 노인은 아직도 20년 전, 나라가 휘청거리던 그해 겨울을 기억한다.


큰 길가 상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간판 불을 끄고, 집마다 무거운 한숨 소리가 골목 담벼락을 넘실대던 때였다.


그날은 유독 눈이 무섭게 내려왔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 때문에 배달 트럭은커녕 사람들의 발길초자 끊겼다.

강 노인은 셔터 손잡이를 잡으며 혀를 찼다.


"에구, 오늘은 공쳤네. 여보, 그냥 문 닫고 들어갑시다. 이런 날 누가 오겠어."


하지만 정숙은 젖은 행주로 카운터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늘 같은 날 문 닫으면 이 골목 사람들 정말 갈 데가 없어요. 라면 하나, 양초 하나라도 사서 올 텐데 그냥 열어둬요."


아내는 먼지 앉은 버너를 꺼내 커다란 양은 냄비를 올렸다.

볶은 보리를 함 움큼 넣고 물을 끓이자, 가게 안은 금세 고소하고 달큼한 수증기로 가득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퇴근길 실직 통보를 받은 앞집 남자가 어깨에 눈을 듬뿍 얹은 채 들어왔다.

난방비가 무서워 냉방에서 버티던 박 여사도 보라색으로 변한 손을 비비며 들어왔다.


그들은 물건을 고르는 대신, 정숙이 건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차 한 잔에 언 손과 마음을 녹였다.


"돈은 나중에 생기면 줘요. 우리가 어디 도망하는 것도 아닌데 뭘."


정숙은 외상 장부조차 펼치지 않았다. 대신 구석에 밀어두었던 식은 떡 몇 조각과 고구마를 난로 위에 올렸다.


밖은 살풍경한 겨울이었지만, 행운슈퍼 안은 사람들의 낮은 웅성거림과 끓는 물소리로 따뜻하게 달궈졌다.


강 노인은 아내가 켜두려던 불빛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얼어붙지 않게 데우는 작은 불씨였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길고 길었던 밤을 함께 견뎌냈기에, 이 좁은 슈퍼는 골목 사람들에게 단순한 가게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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