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켜는 마음

by 김혜진

삼십 년 전, 이 골목은 지금처럼 적막하지 않았다.


강 노인이 공장 문을 닫고 받은 퇴직금 봉투를 쥐었을 때, 세상은 한창 들떠 있었다.

사람마다 '개발'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큰 길가로 나갈 궁리를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내 정숙은 남들과 반대로 움직였다.

그녀가 강 노인의 손을 끌고 온 곳은 햇빛조차 비스듬히 비껴가는 이 좁고 깊은 골목의 끝자락이었다.


"여보, 여기에요. 여기서 시작해요."


정숙이 가리킨 곳은 낡은 기와집 한 채가 허문 자리에 들어선 작은 점포였다.

강 노인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에는 재래시장도 있었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대형 상가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굳이 이 구석진 골목에 슈퍼를 차리겠다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데서 뭘 팔겠다고 그래? 손님보다 쥐새끼가 더 많겠구먼."


강 노인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정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먼지가 자욱한 가게 유리창을 옷소매로 쓱 닦아내더니, 그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골목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 사는 데는 꼭 불빛이 필요해요. 이 골목 깊숙한 곳은 밤이 되면 너무 깜깜하잖아요. 우리가 여기 불 하나 켜놓고 있으면, 늦게 귀가하는 사람들도 마음이 좀 놓이지 않겠어요? 돈은 그다음 문제고요."


그녀의 고집은 묘한 구석이 있었다.


결국 강 노인은 아내의 뜻에 따라 '행운슈퍼'를 운영하기로 했다.

개업 첫날, 강 노인은 어색한 정작 차림으로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잔돈을 거슬려 주는 손이 어찌나 떨리는지 십 원짜리 동전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정숙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며 웃었다.


"당신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속이 뻔히 다 보여요.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을 믿는 거야."


정숙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가게는 문을 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의 거실이자 등대가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백 원짜리 오락기 앞에 옹기종기 앉아 소리를 질렀고, 저녁이면 주부들이 된장찌개를 끓이다 말고 간장 한 병, 두부 한 모를 사러 달려왔다.


강 노인은 아직도 아이들이 꼬질꼬질한 손으로 건네던 동전의 차가운 감촉과 봉투에 담긴 콩나물에서 나던 비릿하고 싱싱한 냄새를 기억한다.


정숙은 그 좁은 계산대 앞에 앉아 손님들의 시시콜콜한 고민을 제 일처럼 들어주었다.


남편과 싸운 옆집 새댁은 여기서 눈물을 닦았고, 고시 공부를 하던 청년은 정숙이 몰래 덤으로 넣어준 컵라면 하나에 다시 힘을 냈다.

수, 금, 일 연재
이전 02화작별을 준비하는 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