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남긴 의자

by 김혜진

슈퍼의 불빛은 밤늦게까지 꺼지는 법이 없었다.

그 불빛은 퇴근길 아버지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고, 학원 차에서 내린 아이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강 노인은 어느덧 생활에 젖어들었다.

가게 구석에서 버너를 켜고 아내와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나눠 먹던 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이던 공간이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풍경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골목 밖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했다.


대형 마트가 들어서고 편의점이 골목 입구를 차지하면서, 행운슈퍼를 찾는 발길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오락기 앞은 비어갔고, 진열대의 물건들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먼지만 쌓여갔다.


무엇보다 큰 균열은 아내 정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보, 나 요새 숨이 좀 가쁘네. 가게 먼지 때문인가?"


가벼운 기침인 줄 알았다.

그저 세월이 흘러 기력이 쇠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돌아온 날, 정숙은 아무 말 없이 강 노인의 손을 잡았다.

이미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의사의 말은 강 노인의 가슴에 대못처럼 박혔다.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는데...."

강 노인의 울먹임에 정숙은 오히려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투병 중에도 가게 진열대를 걱정했다.

"라면이랑 우유는 보이는 데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사람들이 편하게 집어가지."


그녀는 마지막까지 행운슈퍼의 안주인이었다.


정숙이 떠나던 날, 가게 밖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그녀는 강 노인의 거친 손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나, 여기서 있는 동안 행복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슬퍼하지 마."


정숙이 떠난 뒤, 가게의 불빛은 어딘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아내의 자리엔 낡은 담요만 남았고, 강 노인이 홀로 라디오를 틀어도 음악은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는 매일 아침 셔터를 올리고, 외상 장부를 정리하고, 계산대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허다했다.


적막에 익숙해지는 데는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강 노인은 아침마다 셔터를 올리며 습관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여보, 오늘 우유가 좀 늦네."

대답 없는 허공에 말을 걸고 나서야, 아내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내의 빈자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진열대의 통조림 위치를 바꿀 때마다,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 봉지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멈칫했다.


아내가 앉자 있던 나무 의자에는 늘 덮던 누런 털담요가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강 노인은 의자에 차마 안지 못하고 한동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담요에 남은 아내의 옅은 비누 향기가 환기를 시키면 완전히 사라질까 봐, 더운 여름에도 가게 문을 꽁꽁 닫으면서까지 그 냄새를 지켰다.


아내가 사랑했던 이 공간을, 그녀의 손때가 묻은 의자를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강 노인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올라 슈퍼 내부의 낡은 바닥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강 노인은 회상에서 깨어나 주머니 속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가게 문머리에 달린 종이 댕─하고 울렸다.


삼십 년 전 그날처럼, 어색한 정적을 깨는 건 첫 손님의 방문이었다.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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