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필름 한 장

by 김혜진

가게 문머리에 달린 종이 댕─하고 울리는 소리는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적막을 갈랐다.


강 노인은 굽은 허리를 천천히 펴며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찬바람과 함께 들어온 것은 밤색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칭칭 감은 여자아이였다.


"강 할아버지!"


명랑한 목소리가 가게 안의 묵은 공기를 한 번 휘저었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 은지였다.

은지는 동네에서 나고 자라, 코흘리개 시절부터 슈퍼 앞 평상에서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던 아이였다.


"은지구나. 학교 갈 시간 아니냐?"


강 노인의 물음에 은지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교복 가방끈을 고쳐 맸다.


"오늘 1교시가 자습이라 조금 늦게 가도 돼요. 그보다... 엄마가 꼭 들르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 이제 문 닫으신다고요."


은지의 어머니는 골목에서 유명한 여장부였다.

결혼 전,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에 행운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을 챙겨주는 건 일상이었고, 추운 겨울엔 가게 안쪽 방에서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주기도 했다.


"네 엄마가... 참 손이 빨랐지.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가게에 손님이 우르르 몰려와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어."


강 노인의 눈에 아스라한 미소가 번졌다. 은지는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예전 같으면 과자들이 꽉 들어차 있었을 자리들이 이제는 듬성듬성 비어있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먼지 쌓인 선반을 훑다가 진열대 한 구석에 놓인 알록달록한 막대사탕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할아버지, 이거 하나만 사도 돼요? 마지막인데..."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까 그냥 가져가라. 돈은 안 받는다."


강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대신 그는 카운터 아래 깊숙한 곳에서 낡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누렇게 변한 일회용 카메라였다.


아내가 병원에 가기 전, 가게 풍경을 남겨두고 싶다며 사다 놓은 것이었다. 필름은 딱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대신, 나랑 사진 한 장만 찍자구나. 네 엄마한테 보여주게."


"와, 정말요? 좋아요."


은지는 사탕을 입에 물고 강 노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고정했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은지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 정숙과 함께 일하던 은지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찰칵─.


작은 소리와 함께 셔터가 눌렸다.

카메라가 마지막 필름을 감아올리는 소리가 지지직거리며 들려왔다.


"할아버지!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가게 앞에서 강아지 키울 때가 제일 행복했대요. 학교 끝나고 오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녀석 이름이 달구였지. 꼬리가 유독 길고, 낯선 사람만 보면 얼마나 짖어대던지."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가게 안을 채웠다.


은지는 사탕을 가방에 넣고는 꾸벅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엄마가 나중에 꼭 찾아뵙겠대요."


아이가 떠난 자리에는 풍경 소리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짧은 온기 때문이었을까.

강 노인은 조금 전보다 가게 안이 덜 춥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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