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장부 너머의 마음

by 김혜진

드르륵, 댕—.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독 무겁게 들렸다.

이번에는 아이들의 가벼운 발걸음도, 급한 직장인의 구두 소리도 아니었다.


낡은 지팡이가 고무바닥을 짓누르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칠십 대를 훌쩍 넘긴 박 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늘 차고 다니는 해진 무릎 보호대 위로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찬바람에 튼 손등은 마치 논바닥처럼 깊게 패어 있었고, 그 마디 굵은 손가락 사이에는 꼬깃꼬깃하게 접힌 지폐 몇 장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꽉 쥐어져 있었다.


"강 씨, 이제 문 닫는다는 소릴 듣고...... 내 정신 좀 봐, 자다가 말고 부랴부랴 달려왔어."


박 여사는 끊어질 듯한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의 온기로 눅눅해진 지폐를 계산대 위에 소중히 올려두었다.


강 노인은 영문을 몰라 돋보기너머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박 여사님, 갑자기 이게 다 뭡니까?"


"내 마음이 급해서 그래. 내가 예전에 외상으로 가져간 간장이며 설탕이며..... 그 장부에 다 적혀 있을 거 아녀. 나 죽기 전에 그건 털고 가야 윗동네 가서 정숙이 볼 낯이 있지. 안 그래?"


강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카운터 밑에 꽂혀 있던, 빛바랜 낡은 장부를 펼쳤다.


'박 씨 할머니'라고 정갈하게 적힌 아내의 글씨가 빼곡했다.


콩나물 한 봉지, 설탕 하나... 세월의 때가 묻은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어제 적은 듯 선명했다.


"이건 단순한 외상값이 아녀, 강 씨. 내가 전하는 마지막 인사여."


박 여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가게 안을 메운 낡은 향기를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 부부 덕분에 나 이 외로운 골목에서 버틸 수 있었어. 정숙이가 아무 말 없이 내밀던 따뜻한 보리차 한 잔, 자네가 무뚝뚝하게 검은 봉투에 넣어주던 덤... 그 별것 아닌 것들이 내 굽은 등을 펴게 해 준 인생의 큰 힘이었단 말이여."


강 노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장부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까 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박 여사는 지팡이에 다시 몸을 의지한 채, 마지막으로 가게 구석구석을 눈에 담듯 천천히 훑어보았다.


"고생 많았어, 강 씨. 정말... 애썼어."


그 한마디가 강 노인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참으려 해도 자꾸만 차오르는 뜨거운 것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는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며, 멀어져 가는 박 여사의 지팡이 소리를 들었다.


박 여사의 뒷모습이 골목의 긴 그림자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강 노인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이 낡은 슈퍼가 누군가에게는 무너지지 않게 삶을 지탱해 준 작은 기둥이었음을 그는 비로소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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