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연이 Jan 26. 2024

그저 그런 날들과 우울 사이에서

“요즘 기분은 어떠세요?”


“뭐… 비슷해요.”



십 년 가까이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다.


그동안 내 기분은 대체로 Not bad.



금주 전에는 술이 들어가면 텐션이 과하게 올라갔다.


극 I 인 내가 술만 마시면 E의 기분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하게 즐겁다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수순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제력 없는 모습에 자괴감이 몰려왔고, 짝꿍처럼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뒤따라오는 더러운 기분을 두려워하면서도 어쩌면 난 극과 극의 텐션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우울하지 않으면 내가 아니지! 죄책감 빼면 시체지!’



그러다 금주를 했다.


벌써 2년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요즘이 제일 고비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자괴감과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난 늘 부족한 딸, 아내, 엄마일 뿐.


스스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괴로워하면서도 남편의 공격은 허용하지 않는다.


날 탓하는 분위기만 흘려도 방어 본능은 비상사태로 돌입한다.


최근에는 중학교에 올라가는 큰 아이 공부 문제로 다투었다.


아이가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것 같다고.


나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 습관을 들여주지 못한 내 탓이란 걸.


방관자 모드를 유지하던 남편은 친구들의 자식들 얘기를 듣고 오는 날이면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이게 맞냐고 물을 때마다 짜증이 확 몰려온다.


“공부를 시키고 싶으면 당신이 시켜! 난 터치 안 할 테니까.”



불안감이 커진 건 남편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예체능을 줄이고 국, 영, 수에 올인하기 시작하는 엄마들이 늘어난다.


큰 아이와 나이가 같은 친구의 아들은 영어만 네 시간을 한다고 했다.


초등 저학년 아이 엄마도 매일 붙들고 문제집을 풀린다는데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동조하고 싶지 않은 거부감부터 드는 건 날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겠지.


독박 육아를 했기 때문에 내 잘못이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남편에게는.




금주를 한 후 Not bad 인 날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정신과 선생님께서 약을 줄여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셔서 좋다고 했다.


약물에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약을 먹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하는 삶에서 자유의지를 깨워내고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적은 양의 약 한 알을 빼신다고 하셨다.


적은 양이기에 효과가 아주 미미하다고.


호기롭게 알겠다고 했는데, 3일도 안 돼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분이 확 다운된 건 아닌데, 계속 짜증이 난다는 거.


공부에 대한 남편의 푸시가 들어왔던 터라 내 짜증의 상대는 대부분 큰 아이였다.


꼬박꼬박 말을 받아칠 때마다, 소리부터 지르고 볼 때마다 참기 힘든 분노가 치밀었다.


상처 주는 말도 서슴지 않는 날 발견했다.


다행히 아직은 아들이 내게 말을 해준다.


그런 말은 상처가 되니 하지 말아 달라고.


물기 어린 아들의 눈을 보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기저에 짜증과 화가 깔려 있는 것이 정녕 그 작은 약 한 알 때문이라고?


분명 효과가 미미한 약이라고 했는데.


이런 내가 약을 줄일 수 있을까?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


약에 기대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이 난 나쁜 기분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능 없는 글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