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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Dec 27. 2022

집안일을 하며 쓸모 있음을 확인하기

[오히려 최첨단 가족]

집안일은 나에게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특히 요리는 매끼마다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크다. 그래서 음식을 해주었을 때 조마조마하며 상대방의 반응을 살핀다.

신혼 초 남편의 반응은 냉정했다. 맛없다는 말 대신 예의상 한두 번 먹고는 입에 대지 않았으며 맛있다고 한 음식도 두 번은 먹지 않았다. 똑같은 음식을 연달아 먹는 것은 나 역시 싫어했기에 이해했지만 냉장고에 들어갔던 음식도 거들떠보지 않아 속상했다. 버리는 음식이 쌓여갈수록 요리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혼자 살 때도 요리를 귀찮아했지만 요리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먹을 것이므로 맛있으면 맛있는 대로 맛없으면 맛없는 대로 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해준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해주면서 요리가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요리의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첫째 아이는 2.24kg의 저체중으로 태어났다. 살을 찌우고자 열심히 모유를 먹였지만 몸무게가 좀체 늘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모유가 영양가 없는 물젖이라 그런다며 분유를 먹일 것을 권하셨다. 하지만 분유를 먹이는 것은 나의 모유가 영양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그건 내가 엄마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이가 살이 찌지 않는 것이 순전히 내 탓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기에 괜한 오기를 부리며 분유를 먹이지 않았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근거 없는 어머님의 말씀에 개의치 않고 나를 볶아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때는 아이에 대한 나의 쓸모가 절실했기에 나의 존재 가치가, 엄마로서의 가치가 분유보단 낫기를 바랐다. 삶의 의미도 자존감도 없었기에 온전히 아이게게 매달리며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 필사적이었다.


생후 6개월이 되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유식을 시작했다. 정말 나의 모유 때문에 아이가 살이 찌지 않는 것인지 알고 싶어 열심히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다. 그때그때 한 이유식을 더 잘 먹는 것 같아서 바로바로 해 먹였고, 세끼를 다른 재료로 만들었다. 모유로 잃은 엄마로서의 존재가치를 되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이의 살을 찌우지 못하면 엄마로서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성껏 해준 이유식을 아이가 잘 먹지 않으면 화가 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유식을 열심히 먹여서 살을 찌우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이가 살이 찌지 않는 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할당량을 채워 먹였다.

결과적으로 이유식을 많이 먹여도 살이 찌지 않았다. 많이 먹으면 그만큼 똥으로 나왔고 몸무게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이유식 이후 마음 한편은 편해졌다. 아이는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임을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무리해서 많은 양을 먹이지 않았다. 나와 아이를 위해 빠른 포기를 한 것이다.


첫째는 여전히 아주 마른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 몸무게는 꾸준히 하위 1%.

첫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둘째 역시 보는 사람들마다 너무 말랐다고 한다. 체질이라고는 하나 나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첫째가 꼭 자기 전에 그렇게 배고프다고 한다며 친구에게 불평했더니, 친구는 “야 무조건 먹여야지 무슨 소리야”라고 했다. 마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 정도 노력은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체력이 없다. 10시가 넘으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눕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런 나에게 10시가 넘어 배고프다는 아이의 말은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아이가 배고플 때마다 챙겨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지도 못한다. 큰아이는 특히 위가 작아서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는데 그 일이 나에게는 버겁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노는 엄마가 그 정도도 못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일을 하면서도 아이의 밥만큼은 제대로 챙겨주고자 노력하는 엄마들도 많은데 그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우울증 상담을 받을 때도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제일 큰 문제였다. 잘 놀아주지도 않으면서 균형 있는 식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죄책감.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의 음식을 제때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라고 하시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나 자신은 알기에.




박혜윤작가님의 “오히려 최첨단 가족”이란 책을 읽고 이렇게 집안일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구나 싶었다. 네 명의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할 일을 맡아 함께 집안일을 하기에 부담감도 줄고 최소한의 레시피로 재료의 본연의 맛을 살리는 요리를 하다 보니 번거로운 일을 줄일 수 있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이 싫으면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해 먹으면 된다. 작가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이런저런 요리를 시도해보다 귀찮아서 군말 없이 엄마가 해 준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나에게는 책에 나온 가족이 이상적인 가족처럼 보였다. 집안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스스로 집안일에 참여하며 가족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다니. 고작 집안일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필요와 쓸모를 느끼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집안일은 무조건 엄마인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을 때에만 작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느라 집안일에 소홀해지면 곧바로 죄책감이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데 집안일의 부담을 아이들과 나눌 생각은 하지 못했다. 끝도 없는 집안일을 혼자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 때가 많았지만 바꾸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입고 벗은 옷이라도 잘 개어 놓기를, 먹고 남은 과자 봉지만이라도 제때 버리기를 바랐지만 그조차도 잔소리로 이어질 때가 태반이었다.


일찍부터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며 집안일에 참여시키는 부모들을 보긴 했지만 귀찮은 집안일을 분담한다는 정도로 밖에 의미를 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제 슬슬 가르쳐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내가 빨리 해치우고 말지란 생각으로 계속 미루기만 했다.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거나, 내 인생의 무엇인가를 바꾸고 싶을 때 가장 쉽게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연코 먹는 일이다.”

-박혜윤 작가님의 <오히려 최첨단 가족> 중에서


요리는 무엇보다 나에게 부담스러운 일이고,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일이기에 다른 집안일보다 요리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너무 기본적인 일도 시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전자레인지 사용법도 최근에야 가르쳐줬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아이들은 스스로 음식을 데워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재료를 썰어보고 간도 맞추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은 아이들에게 놀이와 같았다. 작가님 아이들처럼 우리 아이들도 요리하는 것을 귀찮아할 테지만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기에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늘려주고 싶다. 요리가 지겨워지면 빨래나 청소를 시켜볼 생각이다. 하기 싫고 귀찮더라도 이제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집안일을 서로 도와가며 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집안일은 엄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살면서 평생 해야 하는 일임을 체득하길 바란다.


둘째가 아빠처럼 돈 버는 것이 더 힘든지 엄마처럼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이 더 힘든 지 물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자격지심에 울컥하기도 하는데 아무리 내가 둘 다 똑같이 힘들다고 얘기해도 아이는 납득하지 못한다. 엄마는 집안일을 하면서 틈틈이 쉴 수 있다는 것이 아이의 생각이다. 집에서 남편은 항상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다. 일에 지친 것도 맞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 일찍 자면 지금보다 덜 피곤할 것 같은데.


“아빠는 친구들을 자유롭게 만나잖아.”

“엄마도 친구들 만나면 되지.”


도대체 언제?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는 친구들과의 만남보다 자유가 더 간절하다. 가고 싶은 곳을 언제든 갈 수 있는 자유. 하지만 그것은 일하는 남편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남편이 나보다 자유롭게 느껴진다. 고된 일을 마치고 나면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는 시간을 원하면 언제든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아직은 아이들에게 집안일과 육아의 고됨을 이해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집안일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집안일의 가치와 고충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집안일의 힘듦을 인정받고 싶어서 함께 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집안일을 스스로 찾아 하면서 가족 구성원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서로에게 필요와 쓸모가 되는 것이다. 밖에서는 일이 뜻대로 안 되고, 힘들고 지쳐서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끼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이 있다. 가정에서는 언제든 자신의 쓸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금주이지만, 가장 큰 행운은 박혜윤 작가님의 책을 읽은 것이다.

내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생각들과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을 해나가는 작가님의 삶 속에서 나 또한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아이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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