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야 하는가
“나는 한국어 사람 아니고 영어 사람이야.”
우리 막내 아이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한 막내는
집에서 한글 공부를 하려고 하면
왜 한국어를 배워야 하느냐고 묻는다.
“엄마, 나는 영어만 쓰는데 왜 한국어 배워야 해?”
“나는 영어 다 알아서 한국어 몰라도 돼.”
“내 친구들은 한국어 모르는데 나는 왜 배워야 해?”
“나는 영어책이 좋아. 한국어책 안 읽어도 돼.”
만 4세에 말레이시아로 이주한 둘째 아이는
가정 어린이집을 2년 다닌 뒤
오빠가 다니던 영어 유치원을 함께 다녔다.
그 당시에는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랐다.
아이가 준비된 시기가 오면 조금만 알려줘도
스스로 터득하고 자연스럽게 발전하리라 생각했다.
큰아이도 6세 후반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7세가 되자마자 동화책을 술술 읽기 시작했기에
작은아이도 이 아이만의 때가 있겠거니
조금 더 기다려도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한국에서 생활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만난 둘째 또래의 한국 아이들 대부분이
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 친구 엄마들의 고민은 모두 아이가 한글을 떼지 못한 것 그리고 한글 배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과 대화가 영어로 이루어지고
교재와 안내문, 책까지 모두 영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굳이 한글을 배워야 할 이유가 없다.
주변 환경 어디에서도 한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도 없다.
그래서 한글 공부를 할 때면 매번 눈물바람이다.
“나는 한글 사람 아니고 영어 사람이야!”
물론 시간을 두고 기다리며 한국어를 가르칠 수도 있고 한국에 돌아가서 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모국어를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면
아이가 다른 언어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생긴다.
유아기에 해외로 온 아이들은
일상 회화는 비교적 빨리 익히지만 학업을
따라가는 데서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일상 대화와 학업 언어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배경지식’이다.
이 배경지식은 현지 학교 수업으로도 쌓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모국어로 된 책, 영상, 그리고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배경지식의 범위와 깊이에 따라 아이들의 이해력과 학습 속도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큰아이는 둘째보다 영어로 말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지만 한국에서 한글을 떼고 왔고 지금도 꾸준히 한국어 책을 읽고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자기가 읽어본 주제가 나오면
“엄마, 그 단어 영어로는 이렇게 말한대!”라며
신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이미 개념과 배경지식이 있기 때문에 이해도 빠르고 단어 습득도 훨씬 수월하다.
우리 아이들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모국어로 쌓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국제학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세이 쓰기다.
에세이를 쓰려면 자기 생각과 개념의 큰 틀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문해력’이다.
문해력이 좋은 아이가 글도 잘 쓴다.
그리고 이 문해력은 어느 정도 모국어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큰아이는 매일 한국어 책을 읽고
한국어로 된 수학 문장제 문제를 푼다.
글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파악하는 연습을 시키기 위해서다.
이 연습을 2년간 해오며 큰아이는 이제
한국어든 영어든 글의 의미를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낸다.
처음에는 한국어도 영어도 그저 읽기만 했을 뿐,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순한 연산 문제조차 자주 틀렸고
담임선생님에게 늘 “언어적인 문제”라는 말을 들었다.
국제학교 엄마 3년 차가 된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모국어다.
한국어가 단단히 받쳐질 때 아이들은 더 빠르고
더 깊이 성장할 수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유아기에 해외로 이주한 아이들의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모든 아이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영어도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주를 선택했고 타국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국어는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의 모국어를 위해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한글학교에 주 1회 다니고 있다.
한국에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다음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내 생활과
해외 이주 후 달라진 나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