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를 찾습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꽃씨를 심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눈동자속에 꽃씨를 뿌리신 분을 만났다. "혹시 네 조상이 한국인이니?"라는 질문 하나로 자신의 눈동자 속에 꽃씨를 파종 하신 분은 89세 할머니 Dr, Donna Runnals다. "한국인에게 관심이 많으시군요"라는 말에 "내가 어찌 한국과 이화여대를 잊을 수 있겠어"하시는 파란 눈동자의 할머니는 시애틀에서 배를 타고 23일 만에 도착한 부산항에서 이름조차 생소한 코리아를 처음 만났다. 6,25 전쟁 직후인 1956년도의 한국은 판자촌과 천막촌, 굶주린 사람들과 헐벗은 아이들로 득실대는 희망없는 나라였다. 선교사로 도착해 눈으로 발로 피부로 살아낸 3년 동안, 한국이 K-pop K-drama, K- food를 유행시키며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처음 그녀의 집을 찾아간 건 5년 전 가을이다. 리타이어먼트 홈에 입사 후 처음 초대받은 입주민의 집이었다. 할머니는 베이지색 바지와 에메랄드 빛 얇은 스웨터 위에 베이지색 니트 카디건을 바쳐 입고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짧은 은발머리에 훤히 드러난 이마 밑으로 깊고 푸른 눈동자가 스웨터 색깔에 비쳐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였다. "웰컴"하며 열어주신 집은 들어서면 부엌과 거실이 있고 출입구 바로 옆에 작은 다용도실과 화장실, 그 옆에 아늑한 침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출입문과 마주 보게 설계된 베란다는 안과 밖을 큰 통유리문으로 구분해 놓아 좁은 거실이지만 밝고 시원했다. 이십여 권정도 꽂힌 작은 책장 하나와 철제 3단 서류 보관함 그리고 3인용 소파와 작은 식탁으로 정리된 깔끔하고 소박한 거실이었다. 자랑이나 허세가 될 장식품이나 유명지에서 찍은 사진 한 장, 기억하고 싶음 직한 학위나 졸업장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캐나다 명문 맥길대학에서 강의를 하시는 틈틈이 10여 개국을 돌며 강의와 선교활동을 하셨으니 자랑하자고 들면 한 달도 모자랄 이력이다. 텅빈 공간이 주는 알수없는 충만감으로 나는 이미 할머니께 압도당하고 있었다.
선교사로 들어가 선교활동과 더불어 영어를 가르치던 추억을 풀어헤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는 할머니는 어린아이 같았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3년 동안 이화여대에서 영문학부 학생들을 지도할 때의 에피소드로 시작된 한국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명한 색깔과 향기로 남아 있었다. 처음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삼십여 명의 여학생 얼굴이 모두가 한 사람처럼 똑같은 거야, 거기에다 모두가 검은색 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고 있잖아, 기가 막히더군" 하시며 양손으로 무릎을 두드리고 목젖까지 다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으셨다.영락없는 스무세 살 아가씨 모습이었다. 어떻게 가르치나 보다 어떻게 서른 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구별해야 하나 하는 것이 더 큰 고민이었다며 손으로 이마를 짚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66년 전, 한국행 배를 타기 전까지는 동양인은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작은 눈과 낮은 코, 거기에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학생들은 모두가 똑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날 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 에게도 생소한 참혹했던 한국의 실상과 가슴 뭉클한 사연들이 풀어놓은 보따리 속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시절의 대한민국은 모든 생필품이 부족했다. 삼시 세끼 끼니를 걱정해 야한 상황이다 보니 집집마다 하나쯤은 필요한 벽시계는 물론이요 손목시계 또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각생의 사유도 시계가 없어 시간을 몰랐다는 이유가 더러 있었으니 오죽하랴. 시계의 필요성을 느낀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시계를 구해 주어야겠다 는 생각을 했다. 여러 개의 시계를 합법적으로 들여올 방법을 고민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밀수꾼이 되어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온 무용담을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말까지 더듬어가며 흥분된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방학을 이용해 홍콩을 다녀올 때, 여름이었지만 밀수를 위해 소매가 긴 옷을 입었다. 양팔에는 손목시계를 찰 수 있는 만큼 많이 차고 세관을 통과하기로 했고 계획은 성공했다. 그때 밀수에 성공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를 했냐고 물었다. “기도하지 않아도 내 심중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크리스천 다운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외국인, 그것도 백인 여자의 몸수색은 거의 하지 못했던 때라 가능한 일이었다.
학비가 없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제자에게 한국어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학비를 지원했다. 방학을 맞으면 휴가를 떠나던 동료들과 달리 보통 사람들의 생활상을 제대로 경험하고자 통역을 맡은 제자와 함께 부산에 있는 식기 제작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만난 아기 엄마 이야기를 시작하시면서는 가라앉기 시작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로 얼굴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를 한여름에도 긴소매로 가린 채 일주일 내내 새벽부터 밤까지 그릇에 그림을 그리고 도장을 찍던 어린 아기 엄마를 잊지 못하고 계셨다. 뼈만 남은 듯 앙상하게 마른 몸에 늘 지쳐 쓰러질 듯 간신히 생을 이어가고 있던 그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도 소매 한번 걷어 올리지 못하고 더위를 견디던.... 퇴근 후엔 지친 몸을 이끌고 젖동냥을 다니던 말도 웃음도 없던 여공의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하신다. 자신의 젖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결혼을 한적도 출산의 경험도 없었던 그녀에게서 젖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군" 하셨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울먹이시는 할머니 손을 잡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셨고 그 이상을 하셨어요. 밀수까지 하셨잖아요"했다. "그렇지? 내가 밀수에 재주가 있었어"하시며 가라앉았던 마음을 끌어올리려 껄껄 웃으셨다.
그녀를 파송한 교단은 몇 년 더 한국에 머물러 주길 원했지만 학업을 끝내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왔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선교활동에 관심이 높았던 그녀는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강단에 섰고 때로는 목숨을 건 선교활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살아온 시간에 후회는 없다. 지금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독서를 하신다. 일주일에 한 번 직접 운전해서 교회를 가시고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걸어서 이십여분 거리에 위치한 오래된 카페에 가신다. 시나몬을 토핑 한 카페라테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카페 안의 사람들을 구경하다 돌아오는 것이 느린 일상 속에서 갖는 작은 즐거움이다. 지금은 COVID 19으로 인해 그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어진 현실에 잘 적응하고 계신다. 바람이 있다면 그 짧은 시간에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다는 한국, 세계 속에 우뚝 선 선진 대한민국 땅을 다시 한번 밟아 보는 것이다. 그러나 89세의 할머니에게 비행기를 타는 일은 불가능한 꿈 인걸 나도 알고 그녀도 안다.
희망이 없던 황무지에 하나님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했던 아름다운 영혼의 그녀, 시애틀에서 배를 타고 23일 만에 도착한 "부산 항구와 이화여대생들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나" 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난 뭐라도 해야 했다. 며칠을 생각하다 다시 할머니를 방문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60여 년 전 모두가 똑같아 보였던, 이제는 그녀처럼 백발이 되었을 제자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기적의 꽃씨를 받아 든 할머니 얼굴이 만개한 박꽃처럼 환해지셨다. 가을밤 달빛 아래 피는 박꽃이 그렇게 예쁠까.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바람 한점 없는 밤하늘에 낮게 걸린 초승달, 말없이 내 등을 떠다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