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 미역국

by 늘보

내일은 내 생일이다. 남편은 오랜만에 제대로 챙기는 생일이니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라고 했다.

오냐. 잘 걸렸다. 그동안 육아에 치여 결혼기념일이며, 생일이며, 어영부영 넘어갔으렷다. 내 요번 생일은 으리으리하고 뻑적지근하게 한번 놀아볼 작정이다. 아이 낳은 후, 목에 걸쳐본 줄이라고는 목주름뿐인 불쌍한 내 목에,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실한 목걸이를 걸어줄 예정이다. 엉덩이에 밥풀 묻은 무릎 나온 바지일랑 벗어던지고, 잠자리 날개 같은 원피스도 하나 사 입어야지. 거북이 등껍질 마냥 매고 다니던 기저귀 가방 대신, 뭐가 들어가긴 들어갈까 싶은 손바닥만 한 핸드백도 하나 사서 들어볼 작정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지. 애 둘러업고 다니느라 언제 신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하이힐을 신고, 굽소리를 경쾌하게 내며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 들어가 코스 요리도 좀 먹어볼까? 평소 같으면 벌벌 떨었을 계산서의 금액도 눈동자의 흔들림 없이 멋지게 계산하고 나와 줄 테다. 일 년에 한 번 뿐인데도 몇 년 동안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생일이니,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 다 하겠다는 행복한 상상에 벌써 엉덩이가 들썩인다.


퇴근한 남편 손에 쇠고기가 들려있다. 내일 아침엔 손수 미역국을 끓여주겠다는 걸 손 사레를 치며 마다했다. 끓이기 시작하는 건 남편이어도 마무리는 내가 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미역국은 내가 애 낳은 날인, 아이들 생일에나 먹겠다며 남편의 성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 순간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내 생일에 미역국을 먹어야 할 사람은 우리 엄마인데!


나를 낳던 날, 7년을 기다리다 얻은 첫아이를 받아 든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미역국을 받아 든 엄마 눈앞에 불이 번쩍 하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으셨다고 한다. 아빠 말씀으로는 갑자기 의료진이 바빠지더니, 엄마 입안으로 온갖 호스들이 들어갔다고 하셨다. 넋을 잃은 아빠에게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이 낳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처럼 잘못되는 건 아닐까 싶어, 아빠는 긴 시간 동안 엄마 곁에서 무서운 생각들과 싸우셨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의식 없이 보낸 엄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적처럼 깨어나셨다. 갓 난 새끼가 자신처럼 엄마 손길 못 받고 자랄 것이 못내 맘에 걸리셨나 보다.


내 생일마다 이 이야기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아빠는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쓰러지신 거라며 농을 하셨고, 그러면 엄마는 갓 난 내가 너무 못생긴 때문이었다고 받아치시곤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그날의 무거운 기억마저 추억으로 곱게 단장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생일을 친구들과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북적이며 치르는 화려한 생일파티는 언제나 즐거웠다. 많이 늦냐는 엄마의 전화에, 이런 날까지 귀가 독촉 전화라며 귀찮아하기도 했다. 그렇게 철없는 딸은 생일은 그저 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 생일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모든 생일엔 아기와 함께 ‘엄마’도 태어난다. 그날은 나와 아이가 처음 만난 역사적인 '우리'의 기념일이 되는 것이다. 그 옛날 엄마도 인생 최고의 기념일을 나와 함께 하고 싶으셨던 건 아니었을까.


엄마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내 생일 아침이면 쇠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를 닮은 나는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쓴다. 만날 감자만 넣은 미역국만 먹다가 귀한 쇠고기 미역국을 먹는 생일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어느 해 엄마 생신, 아침상에 조개 미역국이 올라왔다. 고기 냄새가 싫어 못 드시는 엄마를 위해 아빠가 조개 한 봉지를 사 오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딸은 미역국에 왜 조개를 넣었냐며 투정을 부리고는 국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차라리 철없는 것이라며, 나를 괘씸히 여기셨길 바란다. 혹시라도 생신날, 당신 좋아하시는 조개 미역국을 끓인 것을 미안해하셨을까 봐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갑자기 목걸이도, 잠자리 날개 같은 옷도, 비싼 레스토랑도 모두 시시해졌다. 나는 서둘러 싱싱한 조개 한 봉지를 사 온다. 남편이 의아한 눈으로 조개봉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묻는다.

“당신 고기 넣은 미역국 좋아하잖아.”

나는 남편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내일은 조개 미역국 먹자.”


내일은 조개 미역국을 끓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기념일을 엄마 혼자 보내게 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정성스레 끓여, 바리바리 싸들고 엄마한테 가야지. 엄마와 내 앞에 한 그릇씩 놓고, 두런두런 우리의 추억을 이야기해야겠다. 갓 낳은 내가 고구마같이 못생겼다고 한 것은 꼭 따져 물어야겠다.


내일은 일 년 중 단 한 번뿐인 나의 생일이다. 지금까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떠올리지 못했던 날, 오롯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날이다. 하지만 이제 나만의 생일은 엄마와 나의 기념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우리'는 오래전 첫 대면처럼 내일도 행복하게 서로 마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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