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by 늘보

봉숭아는 유년의 계집아이가 여름을 기다리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돌담 아래 두 손 모은 떡잎 사이로 뾰족한 잎사귀가 수줍게 머리를 내밀면, 치맛자락 나풀거리며 그 곁을 지날 때마다 한동안 눈길이 머물곤 했다. 가녀린 연두 잎사귀가 태양빛을 품어 진초록이 되어가고, 봉숭아 겨드랑이 사이로 하얗고 붉은 꽃이 소녀들의 웃음처럼 꽃망울을 터트리면, 소쿠리 하나 옆에 끼고 단발머리 나부끼며 봉숭아를 따러 나서곤 했다. 수북이 따온 봉숭아에 온 동네 계집아이 들과 이웃집 아낙들이 오순도순 모인 저녁. 하얀 백반가루를 넣고 곱게 빻은 봉숭아를 고사리 손 끝에 조심스레 올리고 정성스레 동여매 주시던 엄마의 손길. 엄마는 손가락에 붉은 물이 들고, 딸은 손톱에 붉은 물이 들며 깊어가던 그날 밤, 마주 보고 웃던 모녀의 마음에는 추억이 물들고 아이들은 설렘을 안고 잠이 들곤 했다.

손가락까지 벌겋게 물들였던 봉숭아 물이 예쁘게 자리 잡을 즈음이면, 봉숭아 잎사귀 사이사이 숨어있던 보물 같은 씨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 모습이 신기하여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호기심 어린 내 얼굴이 우스웠는지 봉숭아는 씨주머니를 터트려 ‘풉’ 하고 씨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다시 생명이 움텄다.


나의 아이가 자라 봉숭아물을 들일 나이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쳇바퀴처럼 도는 바쁜 일상에 삶의 쉼표를 잃어버린 채 지내던 어느 겨울. 기억 밑바닥에 고요히 잠들어 있던 봉숭아와 의외의 모습으로 마주쳤다. 그날 내 앞에 있던 봉숭아는 작열하는 여름 태양에 싱그러운 초록 잎을 반짝이던 봉숭아도 아니요, 생기 가득 머금은 꽃잎을 한들 거리던 봉숭아는 더더욱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비닐봉지 속에 꼭꼭 봉해져 이름만 커다랗게 ‘봉숭아 물들이기’라고 나붙었을 뿐, 그 어느 곳에서도 내가 아는 봉숭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꽃이 피기까지의 즐거운 기다림은 아랑곳없이 송두리째 잘려나가고 편리함을 내세우며 잘 포장되어 나온 봉숭아. 내 유년의 추억까지 그 속에 갇혀버린 기분이 들어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낯섦보다 씁쓸함이 컸던 그날의 기억은 추억의 필름 한 조각을 도둑맞은 것처럼 종일 가슴한구석을 허전하게 했다.

처음 아들의 손에 고무딱지라는 것이 들려왔을 때도 낯섦과 함께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은 기분이 찾아왔다. 다양한 캐릭터와 알록달록한 색깔을 앞세운 고무딱지는 아이들 마음을 훔치기 딱 좋았다. 그러나 돈만 주면 금방 사 올 수 있는 고무딱지는 어딘지 비닐 포장 속 봉숭아와 닮은 것 같아 선뜻 사주기가 꺼려졌다.


고무딱지를 가지고 놀 때 놀더라도, 아들에게 손으로 만든 딱지의 맛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길로 아들과 마주 앉아 빳빳한 달력종이를 찢어 차근차근 딱지를 접었다. 모양이 고무딱지만 못하니 처음엔 그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달력 방석딱지를 시작으로, 박스딱지, 잡지 딱지, 신문딱지들이 방바닥에 쌓여갔다. 일반 딱지 크기의 두 배인 왕딱지를 접었을 땐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나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진심으로 딱지를 접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즐거워 보였는지 아들의 고사리 손에서도 근사한 딱지들이 태어났다. 아들은 딱지를 접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스스로 접은 딱지는 더욱 소중히 여기며 따로 이름도 붙여주었다. 정성과 노력, 시간을 들인 것의 무게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을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이 개선장군처럼 종이딱지를 들고 유치원에 간 이후, 한바탕 종이딱지 열풍이 불었고, 급기야 딱지대회까지 열렸다. 가족대항전으로 열린 이 대회에서 왕년에 딱지 좀 쳤던 아빠들이 더 신이 나서 열을 올렸다.

물질의 풍요와 시간의 결핍. 세상은 좀 더 빠르고 편리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바쁜 부모의 시간을 대신해 줄 것들이 쏟아져 나와야 할 이유이다. 세상이 변하는 걸 탓하거나 질책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조금만 천천히 걷고 싶을 뿐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이렇게 풍요로운 이유는 추억으로 그 시절이 단단히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시간도 따뜻한 추억으로 촘촘히 채워주고 싶다. 튼튼하게 자란 ‘즐거운 기억’의 뿌리가 어른이 되어 지친 어느 날, 삶을 굳게 지탱해 줄 힘이 되어 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올봄, 아이들과 함께 화분에 봉숭아 씨를 심어야겠다. 봉숭아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면, 고사리손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마음에도 추억을 물들이고 싶다. 풍요로운 결핍의 시대에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시간과 추억을 나누는 일일 테니까. 훗날 아이가 추억 상자를 열었을 때 싱그러운 봉숭아의 생명력과 나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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